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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방에 잔소리까지 넣어야 좋은 약사”

개업시 한인 약국 12개 불과 약국들 월구매력 3000만불로 힘합쳐 약 공동구매해야 생존 코로나로 약국도 배달전쟁 클로로퀸 예방약 복용 안될말 약사들은 처방의 최종 감시자 약이 독이 될 수 있다는 진리를 인간은 이미 기원전부터 알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선 약, 독, 주술이 같은 말이었다. 약국(Pharmacy)의 어원인 ‘파르마콘(Pharmakon)’의 뜻이다. 2500년 전 약의 의미는 제발 독이 되지 말기를 바라는 간절함까지 포함한다. 김충섭(영어명 마틴·65) 가주 한인약사회장은 처방하는 이에게 그 간절함이 없다면 환자에게 약은 독이 된다고 믿는다. 그는 39년차 베테랑 약사다. 70년대 이민온 가정의 1.5세 자녀들이 겪었던 삶을 그도 걸었다. 터전 마련하느라 고생하는 부모를 돕고, 육체노동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고 시티칼리지를 거쳐 대학을 나와 82년 약대를 졸업했다. LA한인타운 대표 약국 중 하나인 ‘마틴 약국’이 그가 서른 한 살 때 개업한 첫 약국이다. 85년 8가와 버몬트 인근에 문을 연 이래 35년째 타운을 지키고 있다. 현재 마틴 약국은 그의 여동생이 맡고있고 그는 토런스에서 2개 약국을 운영 중이다. 그의 인생 처방전을 되짚었다. #미래 처방, 미국 1954년 서울서 태어났다. 포스코 전 사장을 역임한 김상억(2009년 작고)씨와 최경옥(2000년 작고)씨의 2남1녀중 장남이다. 최인호(2013년 작고) 소설가, 최영호 라디오코리아 방송위원이 외삼촌이다. 1972년 고3때 LA로 가족이민왔다. 자식들을 위한 부모의 미래 처방전이었다. 아버지는 도착 직후 담석증으로 3주 동안을 앓고 나서도 구직에 나섰다. 포항제철에서 발전소를 설계한 경력으로 200여 군데 이력서를 내밀어 4개월 만에 취직을 하셨다. 어머니는 봉제공장서 바느질을 했다. “아직도 기억한다. 아버지께서 아프실 때 어머니는 가계부를 보시더니 ‘아들아 이번달에 당장 400달러가 부족한데 어쩌니. 네가 200달러는 마련해볼 테니 니가 200달러를 벌어야겠다’고 하셨다. 시급 1.25달러 잔디깎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땐 다들 그렇게 열심히 살았다.” #진로 처방, 약대 공부는 샌타모니카칼리지에서 시작했다. 학비가 거의 무료였다. 등록비 7.50달러만 내면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공부는 잘했다. UCLA로 편입해 의대 진학을 준비하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계기가 있었다. 78년 어머니가 운영하던 작은 편의점에 새벽에 강도가 들어 직원이 변을 당했다. 직원 대신 가게 일을 해야했다. 마침 카운슬러의 조언이 약사를 선택하게 했다. 큰 돈 드는 의대보다 장학금받고 약대를 가라고 했다. 편의점 일을 도와야 했으니 가장 늦게 개학하는 오리건주립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캠퍼스에서 전자공학도인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배려하는 마음씨가 따뜻했다. 82년 약대 졸업 후 결혼했다. LA에 돌아와 롱비치 베터런스병원에서 새내기 약사로 시작했다. 3년을 일했다. 기계적인 처방은 약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머니 약손 같은 약국을 차리고 싶었다. #한인 처방, 약국 부모 집을 담보잡아 85년 개업했다. 그해 12월 한인약사회 송년모임에 모인 회원 약국이 12개였다. 그중 미국에서 약대를 나온 1.5세 약사는 그가 유일했다. “LA 최초 한인 약국이었던 ‘포럼 약국’의 장진성 약사님, 리스 약국 이상주 약사님 등이 대선배셨다. 한인 약국끼리 서로 이끌고 밀어주는 길을 논의했다." 그가 협회에서 할 일은 분명했다. 한국서 약대를 나온 약사들에게 미국 약사시험 공부를 가르치는 클래스를 열었다. 덕분에 한인 약국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지금 남가주에만 150개에 달한다. 약사로 사는 동안 건강한 가족도 꾸렸다. 자녀가 넷이다. 큰딸과 막내 아들은 약사의 길을 이었다. 둘째딸은 자폐아동 특수교사, 셋째 아들은 호흡기내과 전문의다. #38년 처방, 약사 -11년 만에 다시 약사협회장을 맡았다. 협회 내 변화는. “전체 구매 규모로 보면 한인 약국들은 크게 성장했다. 내가 개인 약국을 열었던 85년엔 한인 약국 수가 12개에 불과했다. 당시 구매력은 많이 잡아도 월 몇십만 달러 정도였는데 지금은 매달 3000만 달러가 넘는다. 하지만 갈수록 한인 약국들의 운영이 어려워지고 있다. 재작년까지 남가주 회원 약국이 148개였는데 지난해 2곳이 문을 닫았다. 특히 규모가 작은 약국들이 더 힘들어하고 있어서 어떻게든 살리려 노력하고 있다.” -운영이 어려운 이유는. “중간거래상격인 PBM(Pharmacy Benefit Manager)회사들의 횡포 때문이다. PBM들은 보험사를 대신해 도매상들과 약값을 협상하고 오가는 서류도 처리한다. 개인 약국들은 이 PBM을 통해 제약, 보험사들과 거래하는데 PBM사들이 약국들의 이윤 마진을 갈수록 줄이고 있다. 10여 년 전까지도 하루에 처방전 60개 정도면 약국 운영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150장을 해도 어렵다.” -협회 차원의 대응방안은. “뭉쳐야 산다. 공동구매가 답이다. 협회는 90년대 초반부터 공동구매로 한인 약국들의 이윤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오고 있다. 특히 올해부터 현재 거래 중인 2개 도매상 중 1개사 단독구매 형식으로 바꿔 한인약국들의 이익을 극대화해야 한다.” -회원 약국들의 의견은 어떤가. “코로나 때문에 회원약국들과 미팅을 못해 전달이 안 되고 있다. 다수의 회원이 망설이고 있는 걸로 안다. 도매상을 옮기면 여러 가지 복잡해지니 그냥 하던 대로 하자는 회원도 있다. 물론 번거롭지만 3개월 정도만 지나면 약국들의 이윤이 늘어날 수 있다. 이 기회에 회원들에게 꼭 부탁하고 싶다. PBM사의 횡포와 CVS같은 대형 약국체인과 경쟁에서 동네 약국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힘을 하나로 모으는 수밖에 없다.” -한인 약국 어떻게 달라져야 하나. “약국에서 처방전만 세고 있는 때는 지났다. 약국도 임상을 바탕한 전문 운영에 나서야한다. 2개월 전 멸균클리닉을 열었다. 무균상태에서 만들어야 하는 약들을 전문으로 제조한다. 투자하고 공부해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코로나19 전후 달라진 약국 풍경이 있나. “마치 음식 배달하는 것처럼 우리도 약 배달하느라 바쁘다. 약 나갔느냐, 저거 나가야한다 등 식당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들이 일상이 됐다.” -마스크나 테스트키트 공급 사정은. “초기엔 마스크를 구할 수 없어 약국들도 애를 먹었다. 협회에서 공동구매해 약국마다 분배하면서 지금은 사정이 많이 나아졌다. 테스트키트 회사들의 판매 제안도 협회를 통해 많이 들어오고 있다. 몇몇 회사와 의논 중이다. 아직 FDA에 승인받은 키트는 없는 것으로 안다. 함부로 들여오지 않고 철저히 검증해서 구입할 계획이다.” -말라리아약인 클로로퀸의 코로나 치료 효과에 대해 말들이 많다. “감염 초기에 효과가 있다고들 하지만 의사 처방에 따라 주의해 복용해야 한다. 특히 지병이 있는 환자들은 부작용이 심각할 수 있다. 또 이 약을 코로나 예방약으로 먹는 것은 권하지 않는다. 차라리 자주 손 씻고 입안을 가글링하는 것이 더 확실한 예방법이다.” -4년 전 인터뷰 때 노인들의 약 오남용이 심각하다고 했다.(2016년 3월22일자 1면 기사에서 그는 “먹어야 할 약은 먹지 않고 먹지 않아도 될 약을 먹는 한인 노인들이 의외로 많다”고 했다) “그 기사 이후로 훨씬 계몽이 된 듯하다. 요즘은 시니어 환자들이 약국에 오면 최소한 약 이름은 알고 온다. 예를 들어 예전엔 ‘하얗고 동그랗고 긴 약’이라고 했다면 이젠 성분명을 정확하게 아는 분들이 많다. 환자들도 부작용의 심각성을 자세히 알아야 한다.” 그와 인터뷰했던 4년 전 기사에선 위험한 약의 조합들을 ‘폭탄약’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했다. 당시 일리노이대학의 디마 콰도 박사가 의사협회저널(JAMA)에 게재한 보고서를 인용했다. 대표적인 폭탄 조합의 예가 ‘항혈전제+위산억제제+아스피린’이다. 콰도 박사 연구팀은 “이 약들을 섞어 먹을 경우 심장마비, 내출혈 등 부작용으로 사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한인들에게도 인기가 높은 ‘오메가 3’와 콜레스테롤약인 ‘스태틴(statin)’, 클로피도그렐(clopidogrel·항혈전제), 소염진통제를 함께 복용하면 역효과는 물론, 심장 혈관 질병 위험이 높아진다. -의사들 처방은 건강한가. “은퇴할 때가 가까워지니 이젠 좀 쓴소리를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일부 의사들은 처방전을 많이 써줄수록 좋은 의사가 된다고 착각하고 있다. 얼마 전 남편과 아내가 똑같은 처방전을 들고온 경우가 있었다. 증상이 다른데 어떻게 처방이 같을 수 있나. 실수여도 문제고 실수가 아니라면 더 큰 문제 아닌가.” -훌륭한 약사는. “약사는 의사의 처방을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최종 감시자다. 약사가 의사의 처방을 확실히 견제해야 오남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 환자에게 어떤 약인지, 어떻게 복용해야 하는지,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귀찮을 정도로 잔소리를 해야하는 게 약사의 임무다. 또 약을 줄 때 나을 수 있다는 의지도 함께 처방해야 한다.” -약사 가운 언제쯤 벗으려고 하나. “은퇴는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한의학을 공부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양약, 한약을 병용해 환자들을 돕고 싶다. 은퇴를 한다면 ‘환단고기’에 우리 민족 역사의 시작점이라고 소개된 바이칼 호수로 여행을 가려한다. 또 수도원에서 노동하면서 어렵고 아픈 이들을 약으로 돕고 싶다.” 정구현 기자 koohyun@koreadaily.com chung.koohyun@koreadaily.com

2020-06-08

소방관의 생명시계는 '60초·5분'

김영전 전 교수 2남1녀 막내 UC버클리·UCLA 의대 진학 다치기전 구하려 소방관 선택 3도 화상·골절 등 숱한 부상 한인 일가족 방화 가장 기억나 “가장 센 근육은 따뜻한 가슴” ‘소방관(Firefighter)’은 불과 싸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불을 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서다. 사람 모양을 닮은 불(火) 속에서 사람을 구해내는 일이 불과의 전쟁에서의 승리다. 살리기 위한 싸움은 위험하다. 폭발, 붕괴, 추락, 질식이 곳곳에서 집어삼키려 든다. 구출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들이 입고 짊어진 구조장비는 75파운드가 넘는다. 구조자까지 들쳐메야한다. 측량할 수 없는 생사의 무게가 초인적인 힘의 근원이다. LA시소방국(LAFD)의 김경훈(48·영어명 해럴드) 캡틴은 지난 20년간 그 싸움터로 출동했다. 그는 ‘고수를 찾아서’ 시리즈 기획 때부터 주인공으로 점찍었다. 14년 전 기자와의 인연 때문이다. 당시 5년차 소방관이었던 그를 언론에 처음 소개했었다. 그는 당시 LA한인타운 전담지서인 29 소방서에서 근무중이었다. 명문대 출신인 그가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소방관을 선택한 이력도 돋보였다. <본지 2006년 4월3일자 A-5면> LAFD는 뉴욕, 시카고와 더불어 전국 3대 소방국이다. 하루 평균 1400여 차례 응급출동하고 600명을 응급치료해 병원으로 옮긴다. 134년 역사를 가진 오래된 조직이지만 한인 소방관은 극소수다. 106개 소방서에서 근무하는 3500명 중 아시안 소방관은 5.8%에 불과하다. 소수 중 소수인 그는 14년 사이에 LAFD 내 한인 소방관중 최고위직인 캡틴이 되어 있었다. 한인타운 인근 에코파크 관할지서인 20 소방서의 ‘엔진(engine) 캡틴’이다. 엔진이란 길이가 짧은 전천후 소방차량이다. 사다리가 달린 긴 차량은 ‘트럭(truck)’이라고 부른다. 엔진 캡틴은 소방차량 운전·정비를 맡은 엔지니어, 소방관 2명과 조를 이뤄 함께 구조하고 지시하는 현장 팀장이다. 인터뷰한 날(16일)에 리틀도쿄 마리화나 농축액 제조공장에서 대형 폭발 화재가 났다. 소방관 11명이 다친 현장에서 그도 하루종일 뛰어다녔다. 불길에서 얻은 교훈을 물었다. #명문대 출신 의사 지망생 그는 LA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다. 캘스테이트 LA대학의 교수로 2005년 은퇴한 김영전(84)씨와 LA통합교육구(LAUSD) 소속 교사였던 재닛 김(84)씨의 2남 1녀중 막내다. 교육가 부모 아래서 모범생으로 컸다. UC버클리에서 화학과 정치학을 복수전공했다. 의사가 되라는 부모의 바람을 따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의 은행에 취직했다가 UCLA 의대로 다시 돌아왔다. 그의 운명을 바꾼 수업은 명문대가 아니라 패서디나시티칼리지(PCC)에서다. “뉴욕 은행에서 고연봉도 받았고 의사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항상 남을 돕는 직업을 꿈꿨어요. PCC 서머스쿨에 응급의료라이선스 수업을 듣다가 데이브 와이트(현 컬버시티 소방국장)의 강의에 빠졌죠. 의사는 다친 사람을 치료하지만 소방관은 다치기 전에 구해야 해요. 내 길이다 싶었죠.” #메스 대신 호스 소방관이 되긴 어렵다. 특히 체력시험은 인간 한계에 가깝다. 50파운드 장비를 메고 계단, 사다리를 오르내리고 호스를 끌고 수색하고, 150파운드 마네킹을 35피트 끌어 구조하는 등 8단계 작업을 10분20초 안에 완료해야 한다. 그는 1만8000명 지원자중 600명을 뽑는 30:1의 바늘구멍을 통과했다. 합격 후는 더 험난하다. 6개월 소방학교교육을 이수해야 하며 수습기간 1년을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소방서로 발령을 받는다. 매일이 훈련이다. 가장 중요한 원칙이 60초, 5분이다. 소방관들은 옷을 허물벗듯 소방차 문 앞에 벗어놓는다. 60초 안에 보호장구를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5분 내 출동이 원칙이다. 심정지환자의 뇌손상을 막을 수 있는 골든타임이 4~6분이다. 2001년 그는 타운 전담지서 29 소방서로 첫 공식 발령을 받았다. #'프로비'의 3도 화상 소방관들은 누구나 심각한 화상을 겪는다. 그에겐 아찔한 순간이 일찍 찾아왔다. 수습 소방관을 뜻하는 ‘프로비(Probie)’ 1년을 갓 넘긴 2002년 3월17일 그의 생일날이었다. 베니스 지역 아파트에 큰 불이 났다. 현장에 도착해 지붕에서 진화작업을 하다 불길이 치솟았다. 그걸 끄려고 불길 안에 들어갔다가 큰 화상을 입었다. “당시엔 불 끄는데 치중하느라 뜨거운 줄도 몰랐는데 옆에 있던 캡틴이 날 잡아끌어 구해줬어요. 현장에서 탈출해보니 헬멧과 재킷이 다 녹을 정도의 화염이었죠. 목덜미에서 등까지 3도 중화상을 입었어요.” 후유증이 컸다. 2개월간 침대에서 엎드려서 지내야했다. 화상을 처음 경험한 소방관들에겐 정신적 충격으로 불에 대한 트라우마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온다. “자다가도 이빨이 딱딱 부딪힐 만큼 무서웠어요. 그런데 막상 현장에 복귀하니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무서워할 시간도 없었어요.” 그 후에도 왼쪽 아킬레스건이 찢어져 반년간 재활해야 했고 골절상도 여러차례 당해 수술도 받았다. 소방관의 훈장은 상처였다. 29소방서를 떠난 뒤 소방학교 조교, 26·57 소방서를 거쳐 2015년 캡틴으로 승진해 20 소방서에서 5년째 근무중이다. #한인 최고위 ‘캡틴 김’ -14년 만의 인터뷰다. “언론에 내 이름이 실린 첫 기사가 그때 중앙일보 인터뷰였다. 벌써 그렇게 됐다니 새삼스럽다. 미숙했던 5년차 소방관이 지금은 캡틴이 됐다. 정말 반갑고 다시 한인들에게 소개된다니 영광이다.” -아직도 한글 ‘김’자가 헬멧과 재킷에 새겨져 있나. “그걸 아직도 기억하나(웃음). 물론이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매일 되새기게 해주는 글자다. 현장에서 날 만나는 이들에게 내가 한인임을 알리려고 썼다. 비록 한 글자에 불과하지만 그게 나와 내 아이, 가족의 정체성이다.” -한인으로는 LAFD 내 최고위직이라던데. “2015년에 승진했다. 소방관이 된 후 항상 ‘트럭 엔지니어(운전자)’를 꿈꿨는데 운전대를 잡지 못했다. 2008년 금융위기 여파로 LAFD내 고용, 승진이 중단되면서다. 13년간 ‘파이어맨(fireman)’으로만 근무하다가 트럭 엔지니어 한 계급 위인 캡틴 시험에 합격했다. 지난해 12월 대니얼 이 소방관이 캡틴으로 승진하기 전까지 유일한 한인 캡틴이었다.” -체구가 작다. 승진으로 가는 사다리가 길었나. “내 키가 5피트 8인치인데 우리 팀원 중에서 가장 작다. 후배 소방관 2명은 6피트 4인치다. 소방관들에게 체력이 중요한 이유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아시안에 대한 고정관념이 소방국내에도 있다. ‘똑똑하긴 한데, 체력은 글쎄’하는 식이다. 그래서 더 강해지려 훈련하고 뛰었다. 매일 매일 그 편견을 깨고 입증해보여야 하는 것이 힘들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근무환경이 달라졌나. “누구에게나 항상 열려있던 소방서 문이 닫혔다. 소방관들도 개인보호장비를 항상 착용해야한다. 산소호흡 마스크가 아니라 일반마스크를 쓰고 출동하는 것도 처음이다. 또 출동에서 돌아올 때마다 대원, 차량 모두 철저히 살균하고 있다.” -신고건의 변화도 있나. “코로나 이전 우리 소방서는 하루 평균 20여차례 출동했다. 그런데 팬데믹 초기에 911 신고가 2배 이상 폭증했었다. 거의 대부분이 본인이나 가족의 감염을 의심하는 패닉 상태의 신고였다. 교통사고는 건수는 줄었지만 심각한 사고는 여전하다. 교통량이 줄면서 과속 운전자가 많아진 탓이다. 화재는 뚝 떨어졌었는데 최근 다시 늘고 있다. 본부에서 원인을 분석중이다.” -경제 재개가 거론되고 있다.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어떻게 하느냐를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소방관들이 현장에 나갈 때 되새김질하는 원칙이 있다. 최선의 상황을 바라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라는 말이다.” -잊지못할 화재현장은. “2006년 3월3일 새벽에 발생한 한인타운 5가와 아드모어의 콘도 화재다. 한인 부부와 아들 일가족이 불탄 시신으로 발견됐다. 숱한 현장에 출동했지만 이 화재는 두고두고 가슴 아팠다. 처음엔 사고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살해-자살 방화여서다. 생활고가 원인이었다고 들었다.” 당시 현장 취재기자로 사건을 보도했다. <본지 2006년 3월4일 A-1면> 당초 소방국은 누전에 의한 화재로 추측했다. 나흘 뒤 발표된 검시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윤경원(당시 44세)씨가 중학생 아들 듀크(13)군에게 약을 먹여 재운 뒤 남편 이종관(45)씨를 칼로 찔러 살해하고 본인도 약을 먹고 불을 질렀다. 윤씨는 남편이 간질환으로 앓아 누운 10년간 생계를 책임졌다. 매달 2000달러가 넘는 치료비 빚도 윤씨 몫이었다. -무엇이 가장 두렵나. “불은 두렵지 않다. 소방관에게 불은 다스려야 할 일상이다. 가장 큰 공포는 내 팀원이나 동료가 다치는 상황이다.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그들의 부상은 내가 다치는 것보다 더 아프다.” 소방관의 ‘가족’ 개념은 업무 체제에서 이해할 수 있다. 통상 한 소방서(station)에선 3개 조가 교대로 근무한다. 12~13명씩 편성된 한 조가 24시간씩 격일제로 6일간 일하고 3일 연속 쉰다. 이런 식으로 한 달에 10일을 24시간 함께 생활한다. 소방서 살림도 같이한다. 소방서에는 민간인 직원이 없다. 소방관들이 당번을 정해 요리, 청소, 빨래를 자체 해결한다. 생사의 현장부터 일상까지 공유하고 있어 동료보다는 가족에 더 가깝다. -은퇴는 언제쯤 계획하나. “마흔에 늦둥이 딸을 낳았다. 딸 애칭이 ‘아기 천사(little angel)’다. 딸이 대학 졸업할 때까지 앞으로 15년 정도는 더 일을 해야 한다. 소방관들의 기대수명이 짧아서 몸 관리를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소방관은 일반인보다 평균 10~15년 수명이 짧다. 사고 위험뿐만 아니라 독성물질에 자주 노출돼 암발병률이 높다.)” -꿈이 있다면. “‘트럭’의 팀장 캡틴으로 승진을 준비중이다. 가장 큰 꿈은 부모님이 내게 해주신 것처럼 내 아이들의 성공이다. 필요한 걸 주고 가르치고 키워 성공할 수 있도록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싶다.” -소방관의 정의는. “가장 위급한 상황에서 가장 먼저 시민을 섬기는 공복(public servant)이라고 생각한다. 시민을 보호하겠다고 선서했고, 그 책임을 매우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최고의 소방관이란. “나를 가르쳐준 소방국 멘토들의 공통점이 답이 아닐까 싶다. 소방관뿐만 아니라 어떤 직종에나 적용되는 원칙이다. 먼저 ‘이해’다. 동료를 알고 일에 능숙해야 한다. 다음은 ‘헌신’이다. 월급봉투보다 신념이 앞서야 한다. 마지막이 ‘용기’다. 태어날 때부터 강한 사람은 없다. 내 약함을 인정하고 최고가 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자가 용감한 사람이다.” -인생에 불이 났다. 어떻게 꺼야하나. “소방관들이 현장에서 항상 떠올리는 10계명이 있다. 첫 번째가 ‘항상 생명을 보호하고 구하라’ 이며 두 번째가 ‘도움을 구하는 모든 울음에 귀기울이라’는 것이다. 소방관에게 가장 중요한 근육은 따뜻한 가슴이다. 삶을 소중히 여기고 주변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말라.” 정구현 기자 koohyun@koreadaily.com chung.koohyun@koreadaily.com

2020-05-18

“지금도 전쟁중…거리두기 완화 두렵다”

대학때 배낭여행서 목표 눈떠 변호사 꿈접고 늦깎이 공부 서른 여덟에 면허…부부 간호사 최근 거리두기 완화로 환자늘어 N95 마스크 등 의료품 부족 여전 전염병의 무기는 인간이라는 보편적 취약성이다. 국가, 언어, 인종, 종교, 성별, 빈부는 방패가 될 수 없다. 감염 현장으로 달려가는 의료진에 보내는 박수는 모두가 약한 인간이라서다. 이동규(48) 간호사(RN)도 매일 그 전쟁터에서 내 안의 두려움과 싸우고 있다. 그는 LA카운티 USC 병원(이하 LAC+USC) 응급실 근무 10년차다. LAC+USC는 전국에서 환자가 가장 많은 병원중 하나다. 외래환자는 연간 100만명이 찾는다. 특히 중증외상치료센터 최고 시설 등급인 ‘레벨 1 트라우마센터’를 둔 응급실엔 매년 15만 명의 환자가 실려온다. 총상, 교통사고, 안전사고, 기저질환자 등 촌각을 다투는 환자가 하루 평균 410명, 시간당 17명에 달한다는 뜻이다. 그는 변호사의 꿈을 접고 ‘5년간 죽을 만큼 공부해’ 서른 여덟의 늦깎이 간호사가 됐다. 그를 14번째 고수로 택한 이유는 응급실이라는 특수한 근무환경과 시기의 상징성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20년을 세계 간호사와 조산사의 해로 지정했다. 특히 오늘(12일)은 세계 간호사의 날이다. 현대 간호학의 창시자인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생일을 기념한 날이다. 인터뷰에서 그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정확한 환자수나 자세한 대응상황은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병원의 내부 지침이다. #빈맥. 배낭여행 평창에서 육남매중 막둥이로 태어나 자란 그는 스물넷이 되도록 강원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초중고는 물론 대학도 춘천에 있는 한림대 법대에 입학했고 군대마저 홍천 육군 11사단에서 복무했다. 96년 제대 후 복학해 고시를 준비하다가 ‘지금 아니면 못 가볼 것 같아서’ 유럽 배낭여행을 계획했다. 강원도는 물론이고 나라 밖 첫 여행이었다. 경비는 막노동 아르바이트로 마련했다. 여름에 떠난 40일간의 긴 여정은 그에게 열병같았다. “돈 없이 떠난 여행이라 항상 배고프고 피곤했지만 행복했다. 알프스 산맥의 고봉 융프라우에서 만난 하늘과 로마의 휴일에 나온 트레비 분수옆 이발소, 모로코 해변에서 한가롭게 수영하는 아버지와 아들…. 충격이었다. 아름답다는 건 이런거구나 매순간 깨닫느라 바빴다.” 심장박동이 뛰면서 ‘인생의 빈맥’이 찾아왔다. 고시는 더이상 목표가 아니었다. #고열. 단기선교 싸돌아 다니기 시작했다. 중국, 동남아를 집 근처 나들이하듯 다녔다. 98년 생각지도 않은 기회를 만났다. 한국대학생선교회(CCC)의 단기선교프로그램(SMTC)을 통해 미국에 올 수 있게 됐다. 6개월에서 1년간 거주하면서 언어, 문화를 배우고 캠퍼스를 다니면서 선교한다. 미국은 또 다른 새로운 세상이었다. 방학마다 참가자들과 여행을 떠났다. 여름엔 멕시코에서 캐나다까지 서부를 종단하고, 겨울엔 LA에서 뉴욕, 몬트리올까지 대륙을 횡단했다. “하버드, MIT 학생들을 만나 이야기하면서 또 한번 가치관이 바뀌었다. 내가 보기엔 천재들인데 정말 겸손하고 따뜻했다. 서울대학교에 가지못했다는 열등감에 빠져있던 내가 부끄러웠다. 학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살까가 중요했다.” 뭘해야 하나 고민을 열병처럼 앓았다. #탈진. 5년의 공부 한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정식 유학비자를 얻어 왔다. 한국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아내와 결혼한지 두달만인 2000년 7월3일이다. 먹고 살아야 했다. 아내가 미국 간호사 면허를 공부하는 동안 3년반 일을 가리지 않고 했다. 자바시장에서, 꽃가게에서 일했다. 가슴속 열병의 해결방법은 교회에서 열린 이민 세미나에서 찾았다. 자원봉사를 하던 중 이민변호사의 상담을 엿듣다가 ‘간호사가 최고’라는 말이 계속 귀에 들렸다. 막연하게 꿈만 꿨던 ‘의료선교의 꿈’이 그제야 퍼즐 맞추듯 끼워졌다. 먼저 간호사가 된 아내는 반대했다. “당신까지 이 고생을 하려 하느냐”고 했다. 부모도 '남자 간호사’가 되겠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2004년 엘카미노 칼리지에서 프리너싱 코스를 시작했다. “수업 첫날이 8월 한여름이었다. 강의실에 앉았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 길을 이제야 찾았다는 기쁨에 가슴이 벅찼다.” 2년 과정을 끝내는데 5년이 걸렸다. 법학 전공인 그가 인정받을 수 있는 학점이 없어 영어(ESL)부터 다시 시작했다. 부족한 영어에 의학용어, 실습까지 익히느라 매일 탈진했다. 2009년 12월 졸업했다. 66명 동급생 중 26명만 학위를 얻었을 정도로 힘든 과정이었다. 간호사 면허시험은 산너머 산이었다. 2차례 낙방하고 세 번 만에 합격했다. 취업도 쉽지 않았다. 2008년 경제위기의 여파로 고용이 얼어붙었다. 캐서린 조 남가주간호협회 전회장이 도움을 줬다. LAC+USC 응급실에 딱 한자리가 났는데 지원해보라 알려줬다. 면접장에 가보니 지원서가 책처럼 쌓여있었다. 간호사 시험에 2차례 낙방한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시험을 준비하면서 현장 대처 사례를 집중 공략했었다. 면접 질문은 ‘79세 멕시코 남성이 국경에서 엉덩이뼈가 부러졌다. 에이즈바이러스가 있고 C형간염이 있다 어떻게 도울 건가’였다. “다들 어떻게 치료하겠다고 답했는데 나만 ‘감염을 예방하기 위한 의료진의 안전 확보가 우선’이라고 말했다. 딱 하나 난 자리가 내 것이 됐다.” ‘코드 블루(Code Blue·환자 심폐정지로 소생술이 시급한 상황)’는 그의 운명이 됐다. #생사. 응급실 현장 -최근 할리우드차병원 응급실 간호사가 코로나 감염으로 사망했다.(셀리아 마코스는 지난달 3일 마스크 하나만 쓰고 호흡정지로 실려온 코로나 환자를 간호하다 감염됐고 14일 후 사망했다. 마코스를 비롯해 현재까지 가주에서 36명의 의료진이 목숨을 잃었다) “호흡곤란 환자를 상대할 때가 특히 감염되기 쉽다. 인공호흡기를 기도내 삽관할 때 환자 폐안의 바이러스가 뿜어져 나올 수 있다. 지금 응급실에 근무하는 의료진이라면 위험은 일상이다.” -병원 상황이 어떤가. “춘절(설날·1월25일) 지나고 첫 환자가 들어왔다. 그후 계속 증가하다가 3월 말 정점을 찍고 내려가나 싶었는데 최근 며칠 사이 또 늘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환자들이 오는데 심각하다. 열만 있는데도 검사하는 환자마다 양성으로 나오고 있다.” -다시 늘고 있는 이유는. “날씨가 더워지면서 소셜디스턴싱(사회적 격리)이 느슨해진 것 같다. 경제재개 기대 심리도 한몫했다고 본다. 사회적 격리가 잘 지켜지면 집 밖 외출을 못하니 일반 응급환자는 감소한다. 그런데 요즘 총상, 차량사고 등 중증외상환자들이 예전처럼 실려오고 있다. 이틀 동안 전기톱에 팔이 절단된 환자만 3명이었다. 기존 코로나 환자에 외상환자까지 늘면 응급실로서는 재앙이 된다.” -병원의 대응책은. “트라우마센터(응급센터)내 ‘이스트 유닛’ 1개동을 음압실을 갖춘 ‘코비드 유닛(코로나 응급환자동)’으로 개조했다. 또 병동마다 이중문과 멸균 장치를 설치했다. 병원 앞마당에도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임시병상 텐트 5개동을 만들었다. 응급실 의료진도 조당 7명씩 하루 6개조가 4시간 교대하고 있다.” -숨 쉴 틈도 없을 것 같다. “비상이다. 특히 중환자실 간호사들은 매일 12시간씩 개인보호장구를 쓰고 환자를 돌보느라 탈진상태다. 트라우마센터에 근무하는 나도 코비드유닛 근무를 자원했다. 하루 12시간 근무중 4시간 동안 코로나 환자를 간호한다.” -환자를 어떻게 구별하나. “전염병 상황에 응급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환자 분류(triage)다. 응급센터 입구 앞에서 체온 등 기본 검사시 기침만 해도 따로 분류한다. 다음 심장박동, 혈중산소포화도 등 활력 징후들을 본다. 이후 코로나 테스트를 한다. 한 달 전만 해도 검사 결과가 나오는 데 5일 걸렸다. 다행히 요즘은 40분 만에 확인할 수 있어 빠르게 대처할 수 있다.” -감염 환자 치료는. “혈액배양검사, 엑스레이, 심전도 등등을 교차 분석하면 병세 정도를 알 수 있다. 양성이라도 경증이면 퇴원시킨다. 소셜워커를 연결해 2주간 무료로 지낼 수 있는 자가격리 호텔을 연결해준다. 호흡 불편시 사용할 산소통과 필요한 약들도 격리 호텔로 보내준다. 중증환자의 경우 인공호흡기를 연결하고, 항생제 아지트로마이신과 로세핀을 투여한다. 치료제가 없으니 면역을 키울 수 있도록 조력하는 방법밖엔 없다.” -감염 두려움도 클 텐데. “이미 2차례 자가격리했다. 다행히 양성은 아니었지만 감옥처럼 갇혀 지냈다.” -의료용품 공급 상황은. “최악에서는 벗어났다. 확산 초기에는 N95 마스크가 부족해 살균제로 닦아서 재사용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살균제까지 바닥난 적도 있다. 환자는 넘쳐 들어오는데 보호장비가 부족해 대처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우리 병원 트라우마센터는 전국 최고 수준이라 노하우가 있고 방역 프로토콜을 철저히 지켜 잘 견뎌냈다. 한 달 전부터 공급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넉넉하진 않다.” -의료진의 한 사람으로 정부 대응을 평가한다면. “트럼프 행정부는 실망스럽다. 결국 앤서니 파우치 소장(알레르기·전염병 연구소·NIAID)의 예측이 맞았다. (그는 지난 3월28일 미국내 사망자가 10만 명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11일 현재 사망자수는 8만1000명을 넘어섰다.) 이런 상황에 트럼프 대통령은 ‘살균제 주사(disinfectant injection)를 연구해보라 했다. 대통령이 그 정도로 무지한지 몰랐다. 그 발언 이후 의료진들 사이에서 농담이 생겼다. 열이나 코로나 의심증상이 생기면 동료 의료진에게 ’살균제 남는 거 있으면 주사 한대 놓아달라‘고 한다.” -제재 완화 조치는 어떻게 생각하나. “캘리포니아는 다행히 일찍 자택격리령을 내려 뉴욕과 같은 최악 상황에 대비할 시간을 벌었다. 그런데 요즘 해변 재개장과 영업 재개를 내걸고 시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의료진들은 걱정이 많다. 물론 지금 경제가 어렵고 힘들지만 앞으로 더 어려운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감염 사망자 대부분이 당뇨. 심장병, 폐렴, 신장 기능저하 등 면역성이 낮은 기저질환이 있다. 특히 암투병 환자들은 하루하루 살얼음판처럼 살고 있다. 만약 이런 병을 앓고 있는 가족이 있다면 빨리 열자고 시위하진 못할 거다. 코로나 사태 전 우리 병원 응급실에 하루 평균 500명이 들어왔다. 만약 격리조치가 완화되면 응급실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두렵다.” -LAC 응급실 근무 10년차다. 잊을 수 없는 환자가 있다면. “너무 많아서…. 우린 매일 죽음을 목격한다. 심장마비, 총상, 사고사 등등. 그중에서도 어린 아이가 죽는 경우는 보기 힘들다. 수영장에 빠져 뇌사상태가 되거나 할머니가 후진하는 차에 깔려 숨지면 가족들은 자책감에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어렵다.” -임종 환자를 놓기 어려울 때가 있을 텐데. “사망자는 환자이기 앞서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이고 아들이자 딸이다. 가족을 잃은 상실감은 면역이 되지 않는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 아닌가. 사람이 죽을 때 가장 마지막에 사라지는 감각이 청력이라고 믿고 있다. 숨을 거둔 이의 귀에 대고 항상 마지막 기도를 함께한다.” -위험했던 순간은. “정신병동 응급실에서 근무할 때다. 난동을 부린 환자에게 수갑을 채웠다. 파견온 간호사가 그 수갑을 풀어줘서 아찔한 상황이 벌어졌다. 환자가 바늘을 삼키려 난동을 부렸고 말리려다가 환자와 나, 파견간호사 셋 다 그 바늘에 찔렸다. 그 와중에 환자가 때가 끼인 손톱으로 내 팔을 긁어 상처가 심했다. 환자에 주사한 바늘에 의료진이 찔리면 HIV(에이즈바이러스) 감염이 가장 큰 공포다. 다행히 음성으로 나왔지만 한 달간 약을 먹고 수시로 검사를 받아야 했다.” -한인 환자들 안타까울 때는. “정신병동에서 근무하면서 세상의 끝을 봤다. 한인 이민사회의 이면이 거기 있다. 한 명문대 재학생이 마약 과다복용으로 대낮에 옷벗고 차도 한가운데를 뛰어다니다 잡혀오기도 했다. 교회 장로인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이 아픈 걸 전혀 몰랐다.” -간호는 무엇인가. “공감이다.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면 고통을 덜어줄 수 없다. 애초에 의료진은 환자 때문에 존재하는데도 환자를 내 연봉으로만 보는 동료들이 종종 있다. 공감하려 노력할수록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고 미세한 징후도 알아차릴 수 있다. 같이 울고 듣고 안아야 더 잘 치료할 수 있다.” 정구현 기자 koohyun@koreadaily.com chung.koohyun@koreadaily.com

2020-05-11

“예술보다 평범한 일상이 아름답다”

33년 조형물·세트 제작 전문 주라기공원 테마파크 공룡 꽃차·카지노 등 작품 수천점 예술가 꿈꾼 청춘…오랜 방황 서른 중반에 우울증 극복하고 조형 제작사 거쳐 97년 독립 “노숙자 돕는 삶이 마지막 꿈” ‘예술’은 고상하기 어렵다. 타협하지 못해 고집하다 결국 타협하면 밥벌이가 되고 만다. 변재성(66) 디자인 리얼리티 대표도 평생 예술과 밥벌이 사이에서 떠돌았다. 젖소를 키우고, 돼지갈비집을 하고, 닭을 배달하고, 빌딩청소일에 벼룩시장 상인, 간판 제작을 할 때도 머릿속엔 오로지 예술가만 꿈꿨다. 서른 중반에 삶은 바닥을 쳤다. 대륙횡단을 하다 심한 우울증에 자살만 떠올렸다. 벼랑 끝에서 그가 스스로와 타협한 직업이 ‘조형물·세트 제작전문가’다. 영어로는 ‘시너리 앤 프랍(Scenery & Props)’이라는 일을 33년째 해오고 있다. 대표작은 LA관광명소인 유니버설 스튜디오 내 놀이기구 '주라기공원(Jurassic Park)’의 공룡들이다. 또 매년 LA한인타운 올림픽가에서 열리는 한인축제 퍼레이드에 선보인 수백여개의 꽃차들이 그의 손을 거쳤다. 할리우드 영화세트장,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 폭포, 각종 엑스포 내 대기업 부스 제작에도 땀을 쏟았다. 말만 하면 누구나 알만한 조형물 수천 점을 30여 년간 만들어왔지만 그를 제작자로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지금까지 ‘고수를 찾아서’ 시리즈에 소개한 13명 중 그와 인터뷰를 가장 오래 했다. 그의 예술 인생은 아프고, 좌절하고 일어서느라 길었다. #소 세 마리 목장 경기도 안양 근처에서 1953년 전쟁통에 6남매의 막둥이로 태어났다. 귀여움받고 자란 막내는 자유분방했다. 큰형은 극단 단장을 하면서 서영춘(1986년 작고), 구봉서(2016년 작고)씨와 전국에 공연을 다녔다. 그 열정과 끼는 어린 막내에게 예술의 꿈을 심어줬다. 초중고교에 그림대회에서 입상도 곧잘했다. 손재주까지 있어 미대를 꿈꾼 건 자연스러웠다. 부모는 반대했다. 큰형이 겪은 고생길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집안 형편도 좋지 않았다. 대학을 못가 실의에 빠져있던 그에게 친구가 젖소를 키워보자 했다. 스무 살 어린 청춘에겐 말보로담배 광고의 멋진 카우보이가 떠올랐다. 낭만적인 목장을 꿈꾸며 소를 세 마리 샀다. “계획은 거창했죠. 당시 김종필씨 소유의 서산 목장에 소가 600마리 있었는데 우린 601마리를 키워보자고 했죠. 한 2년 고생만 했어요.” 맨땅에 축사 짓고, 소젖 짜는 법부터 배워 소를 10마리까지 늘렸지만, 하루에 몇 차례씩 풀을 베서 소여 물 주는 고된 노동은 낭만적인 목가 풍경이 아니었다. 그만두고 군에 입대했다. #통나무 간판집 73년 강원도 철원 백골부대 3사단에 배치됐다. 제대가 코앞이던 76년 8월18일 판문점에서 북한군의 도끼만행사건이 터졌다. 휴전선 철책 부대에서 말년 병장의 호사는 없었다. 제대 후 ‘목장 친구’와 다시 뭉쳤다. 이번엔 안양역앞에 돼지갈비집을 차렸다. 폼나는 한정식집을 하고 싶었다. 직접 만든 간판이 유명세를 탔다. 통나무를 잘라 나무결 위에 ‘안양갈비’를 쓰고 쇠사슬로 걸었다. 내부 의자, 테이블도 공예품처럼 만들었다. 길목도 좋아 장사가 잘됐다. 피 끓는 20대 사장에게 유혹이 많았다. 가게 문을 닫으면 술 마시러 가기 바빴다. “노는데 빠져 살다가 어느 순간 이렇게 막 살아도 되나 겁이 났어요. 부모님들 걱정도 많으셨고요. 2년 만에 가게를 접었죠." #도로 위 닭 장사 밤길을 달리고 싶었다. 소 키우면서 알게된 양계장에서 늙은 산란계를 받아 트럭에 싣고 전국 장터를 누볐다. 시골 5일장에서는 육계보다 산란계가 더 인기였다. 알도 낳을 수 있고 육질도 더 쫄깃쫄깃했다. 닭 배달은 밤에만 했다. 30마리씩 구겨넣은 닭장을 층층이 쌓아 수천마리를 한꺼번에 나르다 보니 땡볕에 다니면 폐사하기 일쑤였다. 전라도, 충청도 방방곡곡을 다녔다. 일은 낭만적인 밤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동이 트기 전에 도착하려면 쉬지 않고 밟아야 했으니 졸다가 여러 번 큰 사고가 날 뻔했다. 휴게소에서 불량배들을 만나 돈을 뜯기기도 했다. 3년하다가 여자를 만났다. 중매로 만난 아내는 미국 텍사스에 살았다. 하고 싶은 게 또 생겼다. 포기해야 했던 예술 공부였다. #아메리칸 ‘아트 드림’ 84년 서른 한 살에 미국땅을 밟았다. 오자마자 들이닥친 밥벌이의 압박에 그림 공부는커녕 ‘스리잡(three job)’을 뛰어야 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간판 공장에 나가고 저녁엔 자정까지 빌딩을 청소했다. 주말에는 동네 벼룩시장에 나가 가판대를 깔고 선글라스, 귀고리를 팔았다. “그때 이민온 한인들은 다 그렇게 살았어요.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영어도 못했지만 손짓 발짓하며 일했죠. 힘들게 살면서도 예술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벼룩시장에 장사하면서 이젤을 펴고 그림을 그리곤 했죠." 깨진 환상은 실망으로, 일상의 싫증으로 바뀌었다. #대륙횡단, LA, 우울증 다시 길을 떠났다. 대륙횡단이었다. 아내의 반대는 당연했지만 그의 방랑은 당당했다. 10년된 중고밴을 사서 루이지애나, 플로리다, 조지아, 켄터키, 애리조나를 떠돌았다. 가다가 벼룩시장에 멈춰 물건을 팔면서 호구지책을 했다. 1년 넘도록 길 위에서 보냈다. 흘러흘러 LA에 도착했다. 정착하자, 기회를 꿈꿨다. LA시티칼리지에서 2년간 조각을 공부했다. 작품 공모전에서 여러차례 입상도 했다. 일하던 간판공장에서 ‘퍼레이드 꽃차를 만들어보지 않겠냐’ 제안을 받았다. 87년이었다. 그가 만든 꽃차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홍보차량 장식하러 미국에 왔나 실의에 빠졌다. 이번엔 자기혐오의 늪이 깊었다. 1년 반을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일상 생활을 못했어요. 집안에만 처박혀 있다보니 자기연민에 빠지고 ‘차라리 죽자’ 자살 충동도 여러 차례 겪었죠.” 한국에 나가서 치료를 받았고 교회에 다니면서 다시 힘을 얻었다. 앓다가 죽으나 일하다 죽으나 마찬가지니 죽도록 일해보자 용기가 생겼다. #마흔에 찾은 길 92년 LA폭동 직후 다시 LA로 돌아왔다. 꽃차를 만든 인연으로 ‘렉싱턴(Lexington Scenery & Props)’이라는 회사에 입사했다. 대형 조형물 제작 전문회사였다. 마침 이듬해 한국서 열릴 예정인 대전 엑스포의 삼성우주관을 한창 제작중이었다. 실내 인테리어를 마치 우주선에 앉아 있듯 꾸며야했다. 통역 겸 기술자로 대전 엑스포 현장에 출장도 갔다. 일에 재미가 생기니 욕심도 들었다. 94년엔 실크프린팅 공장을 직접 차렸다. 낮엔 렉싱턴에서 저녁엔 내 사업장에서 밤을 새웠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주라기공원, 식스플래그 우주왕복선, 라스베이거스 호텔, 할리우드 영화세트장, 연극무대 세트 등등 크고 작은 프로젝트 수천건을 제작했다. 꽃차도 줄곧 그의 몫이었다. 97년부터는 독립했다. 지난해엔 농심의 랜초쿠카몽가 공장내 라면견학관을 만들기도 했다. 요즘은 교회 내부 인테리어나 의자 등 성구, 주택 주방 캐비넷 등 가구를 주로 만든다. #인생 마지막 예술 -삶에 굴곡이 많다. “예술가의 꿈과 하루 벌이 현실 사이에서 방랑했다. 삶이 고될수록 앞으로 멋진 예술가가 되는 과정이라고 착각했다. 진짜 내 것은 줄곧 내 안에 있었는데 엉뚱한 데서 찾으려고 했다.” -후회되는 게 있나. “방황만 하다가 서른 후반에서야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 그리고 28년을 해왔으니 천직인 셈이다. 만족한다. 다만 독립해서 회사를 차린 후부터 언어가 편하고 일하기 쉬운 한인 고객만 상대했다. 주류사회 일을 좀 더 했었더라면 아쉬움은 있다.” -본인이 제작한 최고의 조형물을 꼽는다면.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놀이기구인 ‘주라기공원(Jurassic Park)’이다. 가장 어렵고 긴 시간 작업했다. 당시 내가 다니던 렉싱턴 등 20여 개 회사가 참여한 대형 프로젝했다. 94년부터 2년간 매달렸다. (1993년 개봉된 동명의 영화를 주제로 한 주라기공원 놀이기구는 1억1000만 달러를 들여 제작됐고 1996년부터 2018년까지 22년간 유니버설스튜디오의 대표 놀이기구로 인기를 누렸다)” -어떤 부분에 참여했나. “출발점부터 마지막까지 거의 모든 부분에 참여했다. 난제가 많았다. 예를 들면 입구문이 너무 커서 자동 개폐 장치를 설치하기가 까다로웠다. 또 공룡 조형물은 일일이 조각해서 표현해야 했다. 특히 동굴은 끝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도록 텍스처와 조명을 신경 써야 했다. 동굴 마지막 부분에 아래로 뚝 떨어지는 스릴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였다.” -꽃차도 궁금하다. 몇 개나 만든 건가. “세어보지 않아 잘 모르겠는데 수백 개다. 87년부터 지난해까지 32년간 퍼레이드에 나온 거의 대부분의 꽃차를 만들었다. 가장 주문이 많았던 해가 20여대였다. 그러다 점점 줄어들어 지난해 퍼레이드에 나온 꽃차는 1개뿐이었다. 축제 퍼레이드가 예전같지 않아 아쉽다.” -가장 공을 들인 꽃차는. “우선 꽃차의 정의를 정확히 해두고 싶다. 한인축제 퍼레이드에 나오는 꽃차는 대부분 꽃으로 만들지 않는다. 스폰서의 테마에 맞춰 반짝이, 조형물을 장식한다. 예를 들어 항공사면 비행기 조형물 같은 식이다. 2007년 심형래씨가 제작한 영화 ‘디 워’를 홍보한 꽃차가 기억에 남는다. 큰 이무기 형상을 꽃차 앞부분에 세웠다.” -평생 멋진 조형물을 만들어왔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젊을 때는 보기에 좋은 게 아름다웠지만, 지금 돌아보니 평범한 일상이 가장 아름답다. 작년에 랜초쿠카몽가의 농심 공장에 견학관을 지으면서 전시용으로 사람 크기만한 신라면 라면봉지를 만들었다. 아이들이 참 좋아하더라. 있는 그대로를 만들었고 있는 그대로 좋아하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나.” -추한 것은 뭔가. “진실에서 멀어질수록 추하다. 가구공장을 크게 하고 싶어서 2년 전에 기계를 구입했다. 계획한 대로 잘 안되니 기계들이 보기 싫어지더라. 기계가 추한 게 아니라 내 욕심 추했다.” -남은 꿈이 있나. “요즘 화려한 조형물을 만드는 것보다 어려운 사람 돕는데 더 만족하고 산다. 지난해 8월부터 매주 수요일 다운타운에서 300명분 음식을 노숙자들에게 대접한다. 3주전엔 내가 다니는 ANC 온누리교회의 교인이 마스크 1000개를 기부해줘서 노숙자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은퇴하면 홈리스들을 돕는데 전력하고 싶다.” ▶문의:(323)974-4222 변재성 대표 정구현 기자 koohyun@koreadaily.com chung.koohyun@koreadaily.com

2020-05-04

“말은 귀가 아니라 가슴에서 울린다”

남편 강상희 목사와 개척 학교·법원·응급실 비롯 농인 도우미 역할 자처 2006년 남가주농인교회 청빙 특유 ‘농문화’ 알아야 능통 ‘파’는 ‘할 수 있다’는 의미 인디언처럼 고유이름 작명 몸의 언어는 원초적이어서 정직하다. 입의 말은 듣기에 편하지만 나올 때도 들을 때도 왜곡되기 쉽다. 세상이 갇히면서 말은 더 혼란스럽다. 근거 없는 말들과 근거 있는 말들이 뒤섞여 진위를 가리기 어렵다. 그럴 때 사람들은 말보다 몸짓에서 진실의 실마리를 찾는다. 갇힌 세상에서 지난 한달여 매일 정해진 시간 열려온 TV기자회견장에 수화통역사들의 몸짓은 더 돋보인다. 듣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그리는 손과 팔의 동선은 옆에서 발표자의 말보다 역동적이다. 한인 수화통역사를 12번째 고수로 꼽은 배경이다. 9년전 인터뷰가 생각났다. 남가주농인교회 소개 기사<2011년 10월18일자 A-30면>의 주인공인 강순례(53) 사모다. 그는 한국 수화통역사 1기생이다. 32년째 소리의 말을 농인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1988년 특수학교 교사가 되려 서울 영락농인교회를 찾아가 수화를 배웠다. 수화통역사 국가공인자격증이 없던 시절인 1997년 농인협회가 실시한 첫 민간자격증 시험을 통과했다. 2006년 동갑내기 남편 강상희 목사와 남가주농인교회 3대 목사로 청빙돼 미국에서도 한인 농인들을 돕고 있다. 그의 일을 설명하려면 생소한 단어부터 알아야 한다. ‘농아(聾啞)’는 듣지 못하고(聾), 말하지 못한다(啞)는 뜻이다. 청각장애인 뿐만 아니라 언어장애인을 포함하는 말이다. 보통 들리지 않으면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반대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비장애인은 ‘건청인(健聽人)’이라고 한다. 농의 정의는 소리의 크기에 있다. 90데시벨(dB)을 듣지 못하는 고도난청이 ‘농’이다. 귀가 아플 정도의 소방차의 사이렌이 이들에겐 들리지 않는다. 그는 “농인들은 듣지 못해 꼼꼼히 보지만 건청인들은 들을 수 있으면서 듣지도, 보지도 못할 때가 있다”고 했다. 센서스국에 따르면 미국내 청각장애인은 1150만 명 정도다. #못 듣는 세상과 대화 대학 졸업 후 특수학교 교사가 되고 싶었다. 1980년대말 한국에서 수화는 배우기 쉽지 않았다.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시설이 정부의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서울 영락교회 부속 농인교회를 찾았다. 교인수가 400~500명 되는 세계 최대 농인교회였다. 말에서 느끼지 못한 몸의 언어는 매일 새로웠다. 지금의 남편 강 목사는 당시 신학교에 다니던 전도사였다. 날 때부터 농인이었던 남편은 신앙이 깊었고 성실했다. 남편은 ‘미소가 아름다운 순례씨’에게 청혼했고, 두 사람은 91년 결혼했다. 부부는 부천에서 작은 농인교회를 세웠다. 서울영락교회까지 오기 힘든 농인들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농인과 건청인 부부 사역자는 양쪽의 말을 이해했다. 교인 40명 정도의 교회는 얼마안가 120명으로 성장했다. “그때만 해도 수화통역사가 필요한 곳이 많았어요. 교인들뿐만 아니라 농인협회에서 와달라는 요청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졌죠. 학교, 법정, 경찰서는 물론이고 농인 가정에 가서 건청 자녀 수화도 가르쳤어요. 짜장면 주문까지 도운 것도 기억나요.” 2005년 미국에서 전화가 한통 왔다. 남가주농인교회 초대 목사인 이진구 목사였다. 고령인 이 목사가 후임을 맡아달라 요청했다. “미국에 올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0.1%도 없었어요. 갑작스런 부탁에 오래 고민했는데, 오히려 한국 교인들이 적극 찬성해 주셔서 오게 됐어요.” #새로운 세상과 대화 2006년 1월에 도착했다. 남가주농인교회는 1980년 미국 최초의 한인 농인교회다. 역사는 오래됐지만 형편은 한국과 달랐다. 한국 교회는 청년들이 주축인 반면 LA에선 30명 교인중 대부분이 강 목사 부부보다 나이가 많았다. 39살 동갑내기 젊은 목사 부부는 조심스럽게 일의 속도를 조절해야 했다. “시간이 필요했어요. 신뢰가 쌓이면서 고맙게도 어르신들께서 다 우리 부부를 존중해주셨죠.” 교회에서는 건청인들을 위한 수화교실을 열어 농인 세상과의 간격을 좁히는 데도 힘썼다. 부부의 노력에도 교인수는 늘기 어려웠다. 원인은 복합적이다. 농인교회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한 사각지대에 놓인 농인들이 많다. 농인 한 명을 전도하기가 건청인 100명을 전도하는 것만큼 어렵다고들 한다. 이민 추세도 원인이다. 한국의 농인 복지혜택이 미국보다 많아지면서 농인들은 이민을 선호하지 않게 됐다. 그래서 농인교회는 최근 큰 꿈을 꾸고 있다. 한인 2세, 다민족 농인들을 품는데 주력하고 있다. 재작년 가을에 예배 장소도 훌러턴 장로교회로 옮겨 새 출발했다. “8년 전 영어수화를 할 수 있는 한인 전도사가 합류하면서 영어 예배를 할 수 있게 됐어요. 주변에 수화 예배가 필요한 분들이 있다면 우리 교회에서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언어 전달 32년의 대화 -거의 10년 만의 인터뷰다. 농인에 대한 인식은 나아졌나. “올해 우리 교회는 창립 40주년을 맞는다. 남가주 유일의 농인교회인데도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 한인 2세 부모님들은 우리 교회가 있는지조차 몰랐다고들 한다. 농인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작다.” -코로나 때문에 청각장애인들이 겪는 어려움은. “요즘 코로나와 관련된 TV 기자회견에 수화통역사들이 동석한다. 이분들은 마스크를 쓸 수 없다. 그 이유를 건청인들은 잘 모른다. 수화는 얼굴 표정이 아주 중요하다. 같은 동작을 하더라도 어떤 표정을 짓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당신을 좋아해’라는 말을 표정없이 할 때와 활짝 웃으며 할 때 상대가 받아들이는 의미가 다른 것과 같은 이치다. 농인들은 마스크를 쓰면 얼굴이 가려져서 의사 전달하기가 더 어렵다.” -요즘 예배는 어떻게 보나. “농인들에게 만남은 각별하다. 헬렌 켈러는 ‘맹(blind)은 나를 사물로부터 격리시켰지만, 농(deaf)은 나를 사람들로부터 격리시켰다’고 했다. 교회는 농인들에게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장소다. 주일에 모이면 집에 가기 싫어할 정도다. 자택 격리가 된 이후 지난달 22일부터 온라인으로 예배를 보고 있는데 다들 만나지 못해 답답하고 힘들어한다.” -한미 양국에서 농아 가정을 만났다. 차이점이 있나. “장단점이 있다. 요즘 한국의 농인 복지혜택은 미국보다 많다. 예를 들어 전철, 버스 등 대중교통은 보호자까지 무료다. 국내선 항공료도 50% 할인해준다. 미국의 좋은 점은 차별 없는 인식이다. 한국에서 농아자녀를 둔 부모들은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다. 미국은 모든 가족이 다 수화를 배워 농아자녀가 고립되지 않도록 하더라.” -건청인과 농인 사이의 갈등이 빚어지는 가장 큰 원인은. “서로간의 오해 때문이다. 농인들은 건청인들끼리 웃고 떠들면 자신의 욕을 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건청인들은 청각장애인들의 손동작이 커지면 화를 낸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상대가 못 알아 들으면 답답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수화 교실을 아직도 운영하나. “2006년부터 한국어·영어 수화 교육 과정을 가르치다 최근 잠시 휴교중이다. 배우고 싶다는 문의는 많은데 막상 개강하면 참석 못하는 분들이 많았다. 요즘 영어 수화를 배우고 싶다는 요청이 계속 들어와서 개강 여부를 고민하고 있다.” -얼마나 배워야 잘할 수 있나. “영어를 잘하려면 얼마나 배워야 하는지와 같은 질문이다. 한국 수화는 한국어와 다른 고유한 문법체계와 표현양식을 지니고 있다. 언어기 때문에 인내가 필요하다. 단어 2000개를 외우는 초급과정만 16주가 걸린다. 배운 단어를 조합해 문장을 만드는 중급을 거쳐 가장 어려운 관용적 표현을 익히는 고급과정을 거친다. 2년 정도 걸리는데 다 배워도 간단한 의사 소통 정도만 할 수 있을 정도다.” -관용적 표현이 왜 가장 어렵나. “농인들은 문장나열식의 문법적 수어보다는 관용적 표현을 더 자주 쓴다. 딱딱하고 지루한 문장식 손짓에 비해 관용어는 부드럽고 뜻이 무궁무진하다. 관용어는 그들만의 문화를 알아야 배울 수 있다. 이 의사소통방식을 ‘농 문화(Deaf culture)’라고도 한다.” -관용어의 예를 든다면. “수화로 ‘할 수 있다’는 말은 원래 세 단어를 써야 하지만 관용어로는 ‘파’라고만 표현하면 된다. 파는 구화법(독순술이라고도 한다. 상대의 입술의 움직임으로 말을 이해하고, 발성연습으로 음성언어를 익히는 방법)을 배우는 청각장애인들이 촛불을 앞에 놓고 발음연습을 할 때 가장 발음하기 어려워 하는 단어다. 그래서 파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뜻이 됐다.” -다른 농문화를 소개한다면. “수화를 배우기 전까지 몰랐던 것 중 하나는 ‘얼굴 이름’이다. 농인들은 서류상의 이름 말고 다른 이름을 하나씩 갖고 있다. 마치 인디언 이름처럼 '지혜로운 바람’같은 식이다. 얼굴이나 성격상의 특징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내 경우는 강순례라고 하기보다 ‘순례자’에서 연상되는 ‘나그네 여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국가별 농문화도 다른가. “다른 나라의 수화도 자세히 보면 독특한 농문화를 읽을 수 있다. ‘사랑한다’는 말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끌어안는 동작을 한다. 프랑스는 양손가락 끝을 하나로 모은다. 우리말 수화로는 주먹 쥔 왼손 위에 오른손 바닥을 아래쪽으로 해서 돌린다. 아이 머리를 쓰다듬는 동작이다.” -일반인들이 쉽게 쓸 수 있는 수화 표현을 가르쳐달라. “놀랍다고 할 때 건청인들도 양쪽 눈이 빠지는 동작을 한다. 수화도 같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랍다는 뜻이다. 또 목을 손으로 치는 동작을 하면 ‘너 끝장이야’ ‘잘렸어’의 뜻이 된다.” -농인 사역을 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꼈을 때는. “우리 사역은 한 손에는 복지, 다른 손에는 복음을 들고 한다. 복을 주는 사역이다. 한 임신부가 있었는데 검진부터 출산까지 병원에 동행해 통역을 해줬다. 순산했을 때 기쁨은 평생 잊지 못할 듯싶다.” -농인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선교가 우리 교회의 꿈이다. 2012년부터 기독교 신앙이 금지된 A국에 신학교를 세워 돕고 있다. 농인 목사들을 배출하면서 지금까지 35개 농인교회가 세워졌다. 코로나19 때문에 그 교회들도 사실상 마비된 상태라 재정 도움이 필요하다. 또 우리 교회에는 신분 문제 등 가정 형편상 이비인후과 진료를 받지 못하기도 하고 보청기를 살 수 없는 아이들도 도움이 필요하다.” -언어의 고수란. “언어는 성대로 나오는 음성뿐만 아니라 몸짓, 감정, 표정을 아우르는 생각 전달 행위다. 그래서 말할 때 입이 아니라 가슴으로 해야하고, 들을 때도 소리가 아니라 가슴의 울림을 경청해야 한다. 농인들은 수화로 찬양할 때 박자를 듣지 못해 리듬을 맞추기 어렵다. 제각각인 수화가 나오지만 손짓의 울림은 정말 아름답다. 본인의 원래 모습 그대로 꾸밈없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도움 주실 분들:(714)334-4117 강순례 사모 정구현 기자 koohyun@koreadaily.com chung.koohyun@koreadaily.com

2020-04-20

“인생 셈법은 균형…부자도 인색하면 적자”

LA폭동 계기 약자 돕자 결심 20개주 수백여업체 담당 성장 지난해 한미박물관 이사 합류 “올해안으로 착공은 어려울 듯” ‘회계(accounting)’는 ‘컴퓨터(computer)’와 원뜻이 같다. 라틴어 어원(computare)에서 갈라져 나온 형제 단어다. 오차가 없어야 하는 사람의 일이 기계의 이름이 됐다. 말의 속성은 일견 딱딱하게 들리지만 어근(putare)은 ‘사물을 분별하는 슬기’라는 철학적인 뜻도 있다. 셈은 곧 지혜라는 진리는 그만큼 오래됐다. 특히 모든 것이 불확실할 때는 ‘확실한 이익’만 남는다. 유례없는 전염병 시국인 지금이 그렇다. ABC회계법인의 안병찬(61) 대표는 얼마 전 6분짜리 유튜브 동영상에 확실한 셈법을 담았다. 제목도 쉽다. ‘1만 달러 공짜, 따라만 하세요!’다. 영상은 전국의 한인 30만명이 조회했다. 요즘 그는 회계경력 33년 만에 ‘전국구 회계사’로 불리고 있다. 확실한 셈법만 해온 그가 걸어온 길은 불확실하기만 했다. 한국서 대통령이 3번 바뀌는 격변의 시기에 대학을 다녔고, 86년 스물일곱 맨몸에 LA에 와서 고객 한명없이 회계사로 개업했다. 그 후 LA폭동, 911테러, 서브프라임 사태 경제위기까지 풍랑을 겪었지만 회사를 탄탄하게 키웠다. 연매출 1억달러의 대기업 등 20개주 수백개 기업의 회계를 맡고 있다. 어려울 때마다 그가 붙들었던 확실한 셈법은 ‘소신’이었다. 셈법의 고수에게서 인생 대차대조표를 들었다. #가진 자산, 맨몸 초등학교 시절엔 이사다니는 게 일이었다. 6년간 5군데 전학을 다녔다. 살림살이는 그만큼 불안정했다. 아버지 사업이 실패하면서 미래는 더 불투명해졌다. 당시 대부분의 청춘들이 그렇듯 군대가 답이었다. 78년 해군에 지원해 경남 진해에서 군생활을 시작했다. 시국은 어지러웠다. 입대 이듬해인 79년 10.26 사태(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가 터졌다. “그날 연병장에서 휴식하다 긴급방송이 나왔다. 전시에 준하는 ‘진돗개 발령’이 내려졌다. 대통령이 3번 바뀌고 광주민주화까지 터져 초긴장 상태에서 복무해야했다.” 81년 제대 후 7개월을 공부해 건국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교단은 어수선했다. 공부 안 하는 교수들이 짜깁기 교재로 가르치기 일쑤였고 휴강도 밥 먹듯 계속됐다. 그러다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가 터졌다. 학교에서 학점을 상대평가로 매기겠다고 했다. 경영학과에는 그처럼 장학생들이 많았다. 절대평가가 아니라면 장학금을 못받는 학생들이 많아진다. 머리띠를 매고 시위를 주도했다. “대학시절 처음이자 마지막 시위였다. 300명이 모여 일주일간 본관서 밤샘 농성을 했다. 실력없는 교수들 물러나고 장학금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덕분에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답답한 현실속에서 미국행은 어쩌면 당연한 탈출구였다. 1986년 1월3일 맨몸으로 LA에 도착했다. #미래 자산, 미국 회계사가 되리라고 꿈조차 꿔본 적 없었다. 국제경영을 배우려 미국에 왔지만 현실은 주유소, 마켓, 리커에서 일하는 학생이었다. 미국을 가장 빨리 배울 수 있는 길을 찾던 중 신문에 회계법인의 구인광고가 정답처럼 와닿았다. 88년 최정길 회계사 사무실에 입사했다. 학생신분인 그에게 흔쾌히 영주권을 내줬다. “그때 최 회계사님께 약속한 게 있다. ‘제가 받은 은혜 돌려드리기 어렵다. 대신 내가 회계사가 되면 다른 후배에게 그대로 베풀겠다’고. 우리회사 취직하면 무조건 영주권 스폰서를 해주는 이유다.” #현재 자산, 소신 5년 6개월 만에 독립했다. 93년 6월11일이다. 불확실성은 여전했다. 일은 재미가 없었다. 계산기만 두드리는 게 답답하고 월급도 적었다. 따분한 밥벌이는 92년 LA폭동을 계기로 바뀌었다. 폭도들을 막아야 할 경찰이 눈 앞에서 도망가고, 그 와중에 한인 업체들은 속절없이 불에 탔다. 과연 정의가 뭔지 본질적인 의문이 들었다. “폭동 후 한입업체들이 SBA 융자를 신청해도 거절되는 사례가 많았다. 소득신고 미비, 법지식 부족 등으로 받아야할 혜택을 모르고 있는 한인들이 많았다. 결심한 건 ‘적어도 모르고 당하는 한인은 없게 하자’는 소신이었다.” ‘망하면 망하리라’는 생각에 고객 하나 없이 개업했다. 처음 고용한 직원 한명 월급을 크레딧카드로 낸 것이 첫 빚이다. 그후 10년간 일을 가리지 않고 받았다. 새벽 3시에 출근해 저녁 9시에 퇴근했다. 그러던 중 추가 세금 26만달러 통보를 받은 무역회사가 찾아왔다. 억울한 사례였다. 도와드리겠다고 약속하고 세금을 만약 못줄이면 수수료를 받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항소까지 끈질기게 매달렸고 세금을 ‘0’으로 만들었다. 입소문은 금방이었다. 억울한 세금, 벌금에 밤잠 설치는 한인들이 줄이어 찾아왔다. 억울한 한인 없게 하자는 행동은 업무 이후에도 이어졌다. 97년부터 매년 국세청, 노동청, 사회복지국 등 공무원 초청 세미나를 개최해오고 있다. 2000년에는 ‘퀵북’ 강의 비디오를 제작해 배포했다. 지난해부터 시작한 유튜브(안병찬 in USA) 방송 역시 돕겠다는 초심에서 시작했다. 아는 지식이나 경험은 한인사회와 같이 나눠야 할 자산이라고 그는 믿는다. #인생 셈법 -유튜브로 떴다. 전국구 회계사로 불러야 할 것 같다. “동영상 두편 때문에 문의가 폭주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올린 ‘실업수당 무조건 신청해라’, 31일 올린 ‘1만 달러 공짜, 따라만 하세요!’의 조회 수가 각각 26만, 31만이다. 알래스카부터 일리노이까지 전국의 한인들에게서 하루 수백 통씩 전화, 이메일이 쏟아졌다. 지난 2주간 주말도 없이 일했다.” -언제 조회 수가 뛰었나. “유튜브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지난해부터다. 매주 1~2편씩 세무상식을 고객들 서비스 차원에서 만들어왔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편당 조회 수가 잘해야 몇백 정도였다. 그런데 ‘실업수당 무조건 신청해라’는 영상을 올린 지 몇 시간 만에 셀폰의 유튜브 앱에 계속 알림이 ‘딩딩딩’ 울렸다. 실시간으로 조회 수가 끝없이 올라갔다. 그때까지도 실감 못했는데 다음날 월요일에 출근해보니 사무실이 말 그대로 마비됐다. 문의전화가 수백 통이 폭주했고 직원들이 답변을 하느라 일을 못했다.” -유튜브 스타들 부럽지 않겠다. “기분 좋은 현상은 아니다. 내 영상을 많이 봤다는 것은 그만큼 한인들이 많이 어렵다는 뜻이다. 고마운 건 영상을 본 한인들의 98%가 ‘좋아요’를 눌렀다. 도움이 많이 됐다는 의미다. 그전까진 동영상을 반 재미삼아 만들었는데 이젠 책임감 때문에라도 더 잘 만들어야 한다. 이미 고속열차에 올라탔으니 내릴 수 없지 않나.” -유튜브 영상에 광고가 없다. 광고 유치하면 제법 돈이 된다던데. “그러잖아도 광고하자는 제안이 들어오는데 안 붙이려고 한다. 애초 돈벌이용 영상이 아니다. 남 돕겠다면서 중간에 광고로 수익을 챙기면 의미가 있나.” -회계사를 정의한다면. “직원들에게 틈날 때 하는 말이 있다. 사람을 위해 의사가 필요하다면, 기업·가계를 위해선 회계사가 있어야 한다고. 자산 건전성을 진단하고 병(문제)을 치료해 건강하게 운영하도록 돕는 것이 회계다.” -회계 철학이 있나. “법 원칙을 고수하되 고객을 위해 합리적으로 판단해야한다." -무슨 뜻인가. “법은 평등을 지향하지만 현실적으로 만인에게 공평하지 않다. 세법을 어겼다해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도외시할 수 할 수 없다는 뜻이다.” -탈세는 탈세다. “다운타운 봉제공장을 예를 들어보자. 원청업자들이 주는 하청액수로는 합법신분 인력을 도저히 쓸 수 없다. 애초부터 불균형이 시작된다. 또 봉제공장 구직공고를 내면 영주권, 시민권자들은 오지 않는다. 불법체류자들을 고용할 수밖에 없는 선택만 남는 이유다.” -어쨌든 불체자에게 낮은 임금을 주니 노동력 착취 아닌가. “업주가 임금을 더 줄 수 있으면서도 직원들을 이용만 한다면 당연히 착취다. 그런데 먹고 살려는 이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임금도 후하게 주는 업주들도 있다. 그런 업주들이 직원을 착취한다고 말할 수 있나.” -33년간 회계 업계 가장 큰 변화는. “한인 경제가 양적, 질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리커, 세탁소 등 소매업에만 집중됐지만 지금은 업종이 다양해지고 전국 규모의 기업들도 많아졌다. 우리 회사 고객들도 의류, 국방, 첨단기술, 전문직, 인터넷, 프랜차이즈 등등 각 분야에 고르다.” -가족 이야기를 해달라. “결혼이 늦었다. 39살에 했다. 유학생이던 5살 연하 아내와 만난 지 일주일만에 청혼했다. 한 달 뒤 결혼식을 올렸다. 내 청혼이 꽤 설득력이 있었나보다.(웃음) 아들만 셋이다. 장남 데이비드(20), 아래로 쌍둥이 벤자민·조나선(18)이다.” -검도 5단이다. “결혼 직후부터 시작해 22년 됐다. 동서가 만나면 검도 얘기만 하기에 잘 들어보니 내 취향에 딱맞는 운동이었다. 그날로 죽도, 도복 사서 바로 시작했다. 아들들도 내가 가르쳤다. 모두 유단자다.” -한미박물관 이사다. 착공은 언제쯤 하나. “지난해 11월 이사가 됐다. 그동안 이사회에 참석한 게 두 차례라 아직 실무를 파악 못 했다. 기금모금 문제나 현재 모든 경제활동이 중단된 상황을 비춰보면 건설 계획은 늦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올해 안에 착공은 어렵지 않겠나.” -한미박물관측은 이제껏 한 번도 공청회를 한 적 없다. 폐쇄적 운영 아닌가. “말했다시피 아직 내부 사정을 잘 모른다. 다만, 이사로서 박물관이 한인들에 의한, 한인들을 위한 역사적 기관이 될 수 있도록 힘쓰겠다.” -인생의 고수는. “균형의 셈법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적자 인생’은 가진 돈의 많고 적음을 뜻하지 않는다. 한쪽이 기울어진 인생이다. 예를 들어 부를 쌓고도 인색한 사람, 아껴야 하는데 낭비하는 사람이다. 반대로 흑자 인생은 내게 없는 것을 아쉬워하기보다 지금 가진 것으로 채울 줄 안다.” ◆안병찬 회계사 약력 ▶1959년 충북 청주 출생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USC 세법 석사 ▶ABC 회계법인, PayYes Payroll Service 대표 ▶남가주 한인공인회계사 협회 33대 회장 ▶한미박물관 이사 ▶서부검도연맹 회장(검도 5단) ▶청소년봉사단체 YVO(Youth Volunteers Organization) 회장 ▶저서: 퀵북 강의(2000년), 부자들이 알고 있는 절세의 비밀(2006년), 세무감사 이제는 자신있다(2013년) 정구현 기자 koohyun@koreadaily.com chung.koohyun@koreadaily.com

2020-04-13

“놓친 고기 아까워마라…월척 또 온다”

위기 때 바다 찾는 40년 낚시꾼 72년 도미…한인 최초 모피업체 11·21대 LA한인회 이사장 역임 85년 타운에 짓던 쇼핑몰 포기 낚시로 맘잡고 매입한 모텔 적자 3년 전 ‘주택 리모델링’ 재도전 ‘월척(越尺)’은 넘을 월, 자 척을 쓴다. 한자(30cm)가 넘는다는 의미다. 30.3cm의 대어는 낚시꾼들에게 크기의 척도만은 아니다. 물때를 가늠하는 지식과 기다리는 인내, 풀고 감는 기술이 녹아든 열매다. LA한인회 11·21대 이사장을 지낸 사우스힐개발사의 이삼웅(76) 회장은 40여 년간 그 열매 낚는 재미에 빠져 살았다. 돌아보면 바다는 그에게 피난처였다. 78년 석유파동으로 일자리를 잃었을 때도, 85년 LA한인타운에 쇼핑몰을 짓다가 두 손 들었을 때도, 200만 달러를 투자한 모텔을 2008년 포기해야 했을 때도 바다를 찾았다. 그때마다 건져 올린 건 희망이라는 월척이었다. 이민생활 거의 50년이 되어가는 지금, 그는 최고의 월척을 기다리고 있다. #월척 1호, 미국 해방 전년 경북 고령군 덕공면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 둘에 첫 아들을 본 아버지는 기뻐하면서 이름에 석삼(三)자를 붙였다고 한다. 집안의 기둥이었던 아버지는 한국전쟁 나던 해 북한군의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 어려운 형편에 어머니, 누나들과 지게 지고 스무 마지기 땅에 농사를 지어야 했다. 공부는 잘했다. 예동국민학교, 고령중학교에서 1, 2등을 놓치지 않았다. 대구고등학교로 진학했을 때다. 선생님이 칠판에 미국의 인공위성을 설명해주셨는데 ‘풍전등화 한국을 구해준 나라’는 단숨에 동경의 대상이 됐다. 미국에 가고 싶었다. 먼저 군필자가 되어야 해외에 나갈 수 있었다. 대학을 미루고 공군(116기)에 입대해 3년 꽉 채워 복무했다. 제대 후 신촌으로 상경해 입시준비에 매달렸다. ‘시험에 떨어본 적 없는’ 자신감은 주효했다. 64년 고려대학교 역사과에 입학했다. 미국 갈 길을 지도교수에게 물었다. 켄터키주 후배 교수를 찾아가라 연결해줬다. 71년 100달러를 들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월척 2호, 모피 ‘브레시아칼리지’가 있는 켄터키주 오언스버러(Owensboro)는 시골동네였다. 믿고 찾아갔던 교수는 반기지 않았다. 대놓고 나가라고 눈치를 줬다. 막막했다. 한국에서 만난 미국인 친구가 떠올랐다. 모르몬교 선교사 스티브 가드너는 “미국서 도움 필요하면 우리 아버지를 찾아가라”고 했다. 가드너의 부친에게 전화했다. ‘흔쾌히 오라’는 말에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탔다. 꼬박 사흘 반이 걸려 LA에 도착했다. 아들의 방을 내줬고 다음날부터 ‘일하러 가자’고 했다. 건설 컨트랙터였던 친구 부친은 그에게 공사현장을 살갑게 가르쳤다. 시골에 살았으니 고치고 만드는 손재주가 있었다. 목수일은 그에게 자연스러웠다. 바닥기초, 골조, 미장, 마감까지 꼼꼼히 배웠다. 시간당 수당 1.75달러를 받다가 3년 만에 5달러로 월급이 올랐다. 당시 싱글아파트 렌트비가 50달러 할 때다. 은행계좌에 돈은 쌓였지만 신분을 해결할 수 없었다. 육군이 되면 영주권을 준다는 말에 75년 입대했다. 베트남전쟁 막바지였던 때라 파병도 각오해야 했다. 훈련 중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11개월 만에 의병제대했다. 다시 친구 부친집으로 갈 수 없었다. 다행히 대한항공에 취직했다. 화물 서류작성을 맡아 ‘이제 좀 살겠구나’ 싶었다. 그러다 2차 석유파동이 터졌다. 6개월 만에 실업자가 됐다. 또 막막했다. 솟아날 구멍은 엉뚱한 곳에 있었다. 대구 사는 고모가 밍크코트를 구해달라며 3000달러를 송금했다. 다운타운 모피도매상에 갔더니 1000달러면 살 수 있었다. 기회가 퍼덕였다. LA한인타운 최초의 모피가게인 ‘반도모피’를 열었다. “더운 LA에서 모피장사가 웬 말이냐고 더위먹었다고 다들 놀렸지. 그때 한국에서 밍크코트 수요가 폭발적이라는 걸 다들 모르고 한 말이었어.” 일명 ‘김치 GI’로 불리는 한인 미군들은 밍크코트가 한국에선 목돈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국 파병 나갈 때 하나씩 들고가니 날개 돋친 듯 팔렸다. 많게는 하루 3만 달러까지 벌었다. 부동산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한창 많을 때는 18채까지 갖고 있었다. LA한인타운 올림픽가에 쇼핑몰을 짓기 시작했다. 건축을 알고 돈도 있었으니 망할 리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융자없이 가진 현금만 퍼부은 게 화근이었다. 채무불이행 경고장이 쌓이기 시작한 85년, 건물을 포기했다. #월척 3호, 호텔 낙심에 낚시에만 매달렸다. 바르르 손맛에 잡념이 사라졌다. 해가 조금이라도 수평선에 걸려있으면 바다로 갔다. 물때를 익히면서 기회는 또 온다는 자신감도 다시 얻었다. 한국 양평, 가평 등에서 목조주택 짓는 붐이 일 때다. 서울에서 우연히 집짓는 강의를 한 번했더니 수십 명이 몰려왔고, 책을 썼더니 잘 팔렸다. 4~5년간 한국에서 돈을 제법 모았다. 100만 달러를 들여 미주리주에 방 180개짜리 모텔을 샀다. 땅만 10에이커 넘는 알토란같은 ‘은퇴자산’이었다. 호텔로 업그레이드하면 걱정없이 살 수 있겠다 싶었다. 낡은 카펫 떼어내고 페인트 칠하고 땀흘려 리모델링했다. 아들에게 운영을 맡겼지만 사업에 재주가 부족했다. 100만 달러를 더 투자했는데도 적자는 쌓였다. 2008년 금융위기가 터졌고 손을 들어야 했다. 바닷가 갯바위에서 칩거가 다시 시작됐다. 여러 번 엎어졌지만 아내는 잔소리 한번 안 했다. 85년 간호사가 돼서 아직도 LA한인타운 인근 올림피아 병원에서 근무한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다시 공사현장으로 돌아갔어. 3년 전부터 ‘플리핑(Flipping·낮은 가격에 주택을 구입해 리모델링 한 후 되파는 투자)’을 시작했지. 2년만에 100만 달러 수익을 봤어. 다시 입질이 오고 있어서 스릴이 넘쳐.” #최고의 월척, 인생 -놓친 고기(기회)가 많았다. 아깝지 않나. “그게 인생 아닌가. 잡았다가도 놓치고…. 일흔이 넘었는데 지금도 ‘그때 안 그랬더라면’ 후회를 한다. 이미 늦은 후회해봤자다. 고기는 또 온다.” -낚시는 무엇인가. “한 자루다. 낚시가면 빈손으로 돌아오는 때가 거의 없다. 고기가 안 잡히면 홍합이라도 한 자루 담아온다. 낚시는 내게 항상 풍성한 행복이다.” -어떤 고기를 잡나. “주로 흑돔이다. 손맛이 좋다. 다른 고기는 배타고 바다로 나가야 하지만 흑돔은 언제라도 갯바위에만 나가면 잡을 수 있다. 또 대화가 가장 잘 통하는 고기다.” -고기와 대화도 하나. “물론이다. 고기가 입질하면 '아, 네가 왔구나. 오랜만이다. 며칠 못 왔는데’ 중얼거린다. 입질이 계속된다는 건 고기가 ‘밥(미끼) 더달라’는 말이다. 낚시는 고기와 싸움이면서 교감이다.” -얼마나 많이 잡아봤나. “하루 80마리까지 잡아봤다. 파도가 심한 날이었는데 갯바위 사이 웅덩이에 고기들이 갇혔다. 낚시를 던지기만 해도 정신없이 건졌다.” -가장 큰 월척은. “3년 전 바하캘리포니아에서 1.5m짜리 ‘은대구(Black cod)'를 잡았다. 원래 큰 어종이 아닌데 그날 운이 좋았나보다. 처음엔 수초에 걸린 줄 알았는데 줄을 감으니 ‘크다’ 직감이 왔다. 20분간 씨름을 벌이다 끌어올렸는데 상어만큼이나 컸다.” -웬만한 월척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텐데. “고기 욕심은 없어지지 않는다. 튜나와 황새치를 잡아보는 게 꿈이다. 특히 쿠바에 가서 황새치를 잡아보고 싶다.” -고기 잘 잡히는 낚시 포인트 추천해달라. “안 가르쳐준다. 다들 올까봐.(웃음)” -사고를 당한 적 있나. “난 없지만 10년 전 내 친구가 포인트무구 갯바위에서 낚시를 하다가 파도에 휩쓸려 죽었다. 그 친구는 항상 바다에 대해 자신했다. 해군특전사 출신이라고 바다를 잘 안다며 구명조끼를 입지 않았다. 이 기회에 꼭 말해주고 싶다. 낚시할 때 반드시 구명조끼 입어라.” -낚시클럽을 운영한다. “10여 년 전 ‘퍼시픽피싱클럽’을 만들었는데 회원 수는 200명 정도다. 매달 두 번 물때 맞춰 음력으로 15일, 30일 전후로 모인다. 주로 팔로스버디스 절벽 아래 갯바위로 간다. 사람도 없고 낚시하기 좋은 천국이다.” -인생과 낚시는 닮았다고들 한다. “낚시에 물때가 있듯 인생에도 때가 있다. 고기(성공)를 잡으려면 물이 가장 많이 들어온 만조와 빠져나간 간조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 물때에 맞춰 낚시를 던져야 하고, 고기가 물었다면 주저 말고 낚아채야 한다. 진짜 싸움은 그때부터다. 낚싯줄이 끊어져 다잡은 고기를 놓치지 않도록 감고 풀고 조절해야 한다. 월척은 때를 알고 기다리되 서두르지 말아야 잡힌다.” -낚시의 고수란. “항상 바다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바다 열병(sea fever)’이라고 한다. 파도소리, 짠내를 그리워하는 사람이다. 그 열정만 있다면 누구든 고수가 될 수 있다. 설사 오늘 잡지 못했다 해도 내일은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한다. 지금 빈털터리라고 평생 가난하리라는 법 없다. 요즘 주택 플리핑에 재미를 보고 있다. 미국 온 지 거의 50년 만에 경제적으로 최고의 손맛을 느끼고 있다.” 정구현 기자 koohyun@koreadaily.com chung.koohyun@koreadaily.com

2020-04-06

26년 6000일 방송…“마이크 앞이 내 자리”

93년 라코 첫 방송 입담 인기 양 방송국서 납치 ‘영입 경쟁’ 생방송 시간 늦는 꿈이 직업병 방송쉬며 유튜부·사업 몰두 “MC는 하고 싶은 말 대신 청취자 듣고 싶은 말 해야” 본업이 궁금한 사람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다 본업이다. 라디오방송 진행자, CM송 제작자, 음반제작자, 광고회사 사장, 주요이벤트 MC, 시인, 희곡 작가, 짬뽕전문점 사장, 유튜브 채널 크리에이터까지. 광고대행사 ‘에드센스(ADSense)’ 대표 정재윤(55)씨다. 올해 설립 27년째인 에드센스는 한인사회에서 가장 오래된 광고대행사 중 하나다. 그래서 애초 그를 ‘광고의 고수’로 소개하려 했다. 인터뷰 취지를 설명했더니 “난 방송 고수인데?”라고 기사 방향을 바꿔달라했다. 그 말대로 그는 LA에서 자타공인 ‘섭외 0순위’ 진행자다. 91년 대학가요제 LA지역 예선 진행을 시작으로 그는 29년간 쉬지않고 마이크를 잡았다. 특히 93년 라디오코리아(이하 라코)에서 첫 방송진행을 맡은 이래 지난해 12월 라디오서울(이하 라서)을 그만둘 때까지 26년간 방송계 블루칩으로 불렸다. 주말과 중간중간 방송을 쉰 시간을 빼도 6000일이 넘는다. 그 긴 세월을 글이라는 마이크로 지면에 옮겼다. 4시간 넘도록 말은 매끄러웠고, 예상을 뒤엎었다. 고수다. #모범생 기타를 잡다 ‘귀한 집 자식’으로 컸다. 청주의 부잣집 딸인 어머니와 유명건설회사 임원인 아버지 사이에서 1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학창시절 모범생인데다 키 크고 반듯한 외모로 인기를 독차지했다. 부모는 의사나 판검사가 되길 바라셨지만 ‘끼’는 감출 수 없었다. 중3 때 기타를 잡으면서 음악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독학으로 기타를 배웠고 곡을 썼다. 밴드의 리드싱어가 되는 건 자연스러웠다. 경영학도로 대학에 갔지만 이미 미래는 결정되어 있었다. #축제, 마이크를 잡다 대학 1학년 때다. 여대 학과파티에 사회를 봐달라는 친구 부탁을 받았다. 진행자로 무대에 처음 올랐다. “전영록, 서유석, 김창완 같은 당대 유명가수들 모창도 하고 사회를 보는데, 호응이 너무 뜨거웠다. ‘오 되네? 난 연예인을 해야하겠구나’ 싶었다.” 88올림픽이 열린 그해 부친 사업이 어려워졌다. 돈을 벌어야 했다. 낮에는 리어카를 끌고 잠실경기장서 김밥도 팔고, 이화여대 앞에서 액세서리도 팔았다. 밤에는 소공동 롯데호텔 스카이라운지, 대학가 카페에서 통기타 치며 노래를 불렀다. 틈틈이 과외도 했다. “당시 가수 한 타임(30분)을 뛰면 10만 원을 받았다. 또 과외도 몇십만 원을 줬고. 일반 회사원보다 더 벌었던 때다.” 재밌는 청춘이었지만 계속 하루 벌이로 살 수는 없었다. #미국, 탈출구를 잡다 LA에 살던 외삼촌이 ‘미국 오라’ 초청했다. 탈출구로는 최고였다. 하고 싶은 음악 제대로 하면서 성공하고 싶었다. 삼촌 집인 베벌리힐스 저택에서 1년을 지냈다. 그동안 삼촌은 ‘미국 익혀라’면서 매달 적지않은 용돈을 줬다. ‘뒤뜰에 물주고 개밥 주며’ 1년여를 보내던 91년 어느 날 은행에 갔다가 인생 전환점을 맞았다. “KBS 대학가요제 축제 LA지역 참가자 모집 광고를 봤다. 행사주관사인 스티브신 프로덕션에 무작정 찾아갔다. 내가 쓴 곡들을 들려줬더니 깜짝 놀라더라. 그날부터 행사 프로듀서를 맡았다. 참가자들 곡 써주고, 훈련시키고, 행사 사회보고, 광고 브로셔 디자인까지 도맡아 했다.” 2년간 도맡아 한 가요제가 화제가 되면서 93년 라코에서 진행자 섭외가 들어왔다. 주말프로그램의 새내기 진행자였지만 방송 마이크를 잡으면서 입담은 날개를 달았다. 불과 몇 개월 만에 황금시간대인 오전 10시 방송을 맡았다. ‘행복이 머무르는 곳에’였다. 그후 26년간 그가 머무른 곳은 정상이었다. #방송·광고를 잡다 인터뷰에서 그는 본인이 방송 섭외 ‘0 순위’라고 자신할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라디오 두 방송국의 ‘납치사건’이다. 98년이었다. 라코에서 노조 결성 움직임이 있었고 해고됐다. 라서로 가기로 계약했다가 라코측이 그러면 되냐면서 다시 일하자는 읍소에 라코로 복귀하기로 했다. “방송 당일이었다. 집앞에 낯선 밴차량에서 남자 둘이 내리더니 다짜고짜 그를 차에 태웠다. 라서 광고국 직원들이었다. 라서 사무실로 갔더니 자기들과 일하기로 한 약속을 어떻게 어기냐고 따지더라. 어쩔 수 없었다. 라서와 월요일 첫 방송을 하기로 했다.” 방송을 앞둔 주말 금요일 그는 라코에 또 납치됐다. 당시 김모 상무가 그를 다짜고짜 차에 태워 샌디에이고로 달렸다. 그리고 라서측에 전화해 “재윤이 우리랑 방송한다”고 끊었고, 월요일 생방송 직전 LA로 올라와 원고도 없이 복귀방송을 했다. 진행자로 몸값이 오르는 동안 사업도 벌였다. 작은 스튜디오를 차려 CM송을 만들었다. 50여곡 대부분 히트를 쳤다. ‘천사를 만나세요 일년 삼백육십오일~’, ‘프로니까 풀어줘요~’, ‘선셋, 선셋 스튜디오’ 등등 귀에 익은 CM송들은 아직도 방송을 탄다. 음반제작사를 차려 ‘제노스(Xenos)’라는 남성 4인조 아이돌 그룹을 한국에 데뷔시키기도 했다. 신화의 ‘에릭’도 그가 픽업한 가수다. 음반제작을 하다 사기를 당했고 CM 제작을 하면서 기회를 본 광고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웬만한 한인기업, 로컬업소들은 그에게 한번 일을 맡기면 무조건 믿었다. 한때 직원 13명을 두고 연매출 500만 달러를 올려 성공한 사업가로도 불렸다. 책도 3권 썼다. LA호박씨(97년), 한인 33인의 성공자서전 달러를 캐는 사람들(98년), 호박꽃 당신(99년)이다. 돈 버는 여러 직업들은 많았지만 그는 여전히 “마이크앞이 내 자리”라고 했다. #'팔색조' 정재윤 -방송 쉰다. 요즘 뭘 하나. “광고회사는 시장 규모가 예전만 못해서 일을 줄였다. 대신 3개월 전 론칭한 유튜브 채널 'JCTV'에 공을 들인다. '문상렬의 월드스포츠', '알약모독(알면 약 모르면 독)', 숀리 TV 등 3개를 운영한다. 문상렬 스포츠전문기자의 채널은 편당 조회 수가 수십만일 정도로 인기가 높다. 또 한국 유명 짬뽕전문점인 '교동짬뽕' 미주지사장을 맡고 있다. 한인타운 마당몰 직영점을 운영하면서 전국에 10개 지점을 열었다.” -방송 싫을 때도 있었나. “내 방송이 소음공해로 느껴질 때다. 요즘 라디오방송에선 제품 홍보를 중간에 끼워넣는다. 예를 들어 얼마 전까지 태양광 패널 설치가 인기였다. 월요일은 'ABC솔라', 수요일은 '가나다솔라', 금요일은 'ㄱㄴㄷ솔라' 이런 식으로 회사마다 소개를 해줘야 했다. 제품이 별반 다르지 않은데 타회사보다 낫다고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되풀이해야 했다. 청취자들에게 미안해서 한번은 대놓고 말했다. '정말 재미없죠? 어떻게 합니까. 우리도 먹고 살아야죠'하고. 그럴 때 힘들다.” -생방송 중 실수는. “아찔했던 기억이 있다. 김일성 사망일(1994년 7월9일)이다. 라코에서 저녁 방송을 맡고 있었다. 그날 방송사 직원 모두가 비치페스티벌에 차출돼서 샌타모니카에 가 있었는데 김일성 사망 속보가 나오기 시작했다. 스튜디오 비상전화가 울렸다. 최영호 부사장이 '광고 내보내지 말고 계속 김일성에 대해 떠들어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뭐 할 이야기가 있겠나. 뉴스를 해봤나 내가. 그래서 '저…김일성이 죽었답니다. 그런데 왜 죽었을까요?'이런 말도 안 되는 멘트로 몇 시간을 끌었다. 등줄기에 땀 꽤 흘렀다.” -가슴 아픈 사연은. “한인타운 8가길 쇼핑몰 주차장에 붕어빵 가판대가 있었다. 너무 맛있어서 방송에서 소개했다. '여러분~ 호떡 좋아하세요? 이렇게 정성들여 만든 호떡 처음입니다. 한번 드셔보세요'하고. 그 다음주에 갔더니 호떡 파는 아저씨가 '호떡집에 불났다'면서 내 손을 잡고 너무 고맙다 했다. 그래서 또 한번 소개했다. 그 다음주에 갔더니 가판대가 없어졌다. 누군가가 시샘해서 불법업소라고 신고했다더라. 도와주려고 소개했는데 결국 나 때문에 장사를 못하게 됐다. 도우려는 선의가 상대에겐 선의가 아닐 수 있다는 걸 그때 실감했다.” -사회도 많이봤다. 안 하고 싶은 행사는. “자기들끼리 떠들고 농담을 던져도 안 웃으려고 꾹 참는 자리다. 웃긴 얘기하는데 다들 무표정이면 난감하다.” -라디오방송 인기도 예전만 못하다. “라디오가 사양 미디어라고 하는데, 난 그렇게 생각 안 한다. 라디오는 바퀴벌레다. 끝까지 살아남을 거다. 한국어 방송을 뭐로 대체할 건가. 거꾸로 생각하면 지금이 한인 라디오방송국들이 제 2의 도약을 할 수 있는 기회다.” -요즘은 '보는 라디오'가 인기다. “난 반대다. 얼굴 나가는 게 싫어서 작년 12월에 방송 쉰다 했다. 예전에는 신기해서 다들 영상속 라디오방송 진행자들을 지켜봤지만, 접속자수가 30~40명 정도밖에 안되더라. 유튜브에 재미있는 영상들이 수백만 개인데 누가 라디오방송을 영상으로 보겠나. 라디오도 원칙으로 돌아가 오디오로 승부해야 한다.” -직업병이 있나. “요즘도 생방송에 늦는 꿈을 꾼다. 26년 방송하면서 딱 한번 지각한 적 있는데 그 후부터 불안감에 강박관념이 생긴 거다. '진행병'도 있다. 사람 만나면 조용한 걸 못 견딘다. 말이 꽉 차야한다. 방송은 2초만 정적이 흘러도 방송사고니 진행하는 게 버릇이 된 거다.” -최고 파트너는. “이영돈씨다. 라서에서 99년~2000년에 투멘쇼를 함께했다. 그때만 해도 남녀 진행자가 공식이었는데 남자 둘이서 진행한 첫 프로여서 화제가 됐다. 여성 진행자는 이정원씨가 호흡이 잘 맞고 '영자의 전성시대(1975년 개봉)' 여주인공이었던 염복순씨도 기억에 남는다.” -잊지못할 청취자는. “2000년 라서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코너를 할 때다. 별의별 사연이 많았는데 그중 10.26 사태(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의 범인인 당시 김재규 중정부장이 사형된 게 아니라 아직 살아있다면서 증거를 갖고 있다는 제보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자는 말에 방송 끝나고 비행기 타고 갔다. 약속한 시내 골목길에서 만났는데 오른쪽 안주머니에 손을 넣고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누군가 자기 뒤를 쫓고 있다면서 총을 갖고 왔다더라. 얼마나 무서웠는지…. 자기 집에 증거가 있다고 가자는데 어떻게 가나. 그날 밤 비행기로 바로 돌아왔다.” -방송 후배들에게 한마디. “본인의 가치는 방송국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부단히 노력해서 나만의 스타일을 갖게된다면 가치는 올라가게 되어 있다.” -남은 꿈이 있나. “만족한다. 89년에 맨몸으로 LA에 떨어졌는데 31년이 지난 지금 기자가 날 '고수'로 인터뷰해주니 성공한 인생이다. 하나 남은 건 영화 시나리오나 드라마 각본을 쓰고 싶다.” -인생 고수는. “방송의 고수를 말할 순 있다. 나만의 원칙이 있다면 방송은 쉽고, 재밌고, 간단해야 한다. 다양한 어휘나 현란한 표현보다 꾸미지 않는 진심이 청취자에게 전달되어야한다. 그래서 MC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상대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 정구현 기자 koohyun@koreadaily.com chung.koohyun@koreadaily.com

2020-03-23

코로나19 방역 특수 “오히려 안타깝다”

20년 해충방제방역 전문가 최근 매일 10곳 코로나 소독 사업 실패 LA서 무일푼 시작 쉰에 방역배워 7년만에 독립 코로나 위기 고통분담 동참 매장 소독비 100달러로 낮춰 벌레 잡던 그가 바이러스를 잡게 될 줄 본인도 몰랐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최근 방역회사들이 바빠졌다. ‘K-타운 터마이트&페스트’의 조현규(70) 사장도 2~3주 전부터 매일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일한다고 했다. 감염 확진 판정을 받은 대한항공 승무원이 LA한인타운을 돌아다녔다는 가짜뉴스가 퍼지면서부터 방역 주문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와달라는 곳이 많아 주말도 없이 하루 7~10곳에 ‘약 치러’ 다녔다. 부에나파크의 ‘더 소스’같은 대형쇼핑몰을 비롯해 대형건물, 신학교, 식당 등이 고객들이다. 보통 방역회사가 바쁜 시즌은 벼룩, 개미가 들끓는 여름이다. 그는 “20년간 방역일하면서 비수기에 소독하느라 바쁘긴 처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일이 많으니 수입은 늘었지만 힘들어하는 한인 업소들 사정을 매일 보니 오히려 안타깝고 미안하다”고 했다. ‘고수를 찾아서’ 일곱 번째 인물로 그를 정한 건 코로나라는 시의성도 있지만 인생 굴곡을 겪고 난 뒤 찾은 일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다. 하동 부농의 아들로 돈 아까운 줄 모르고 살다가 사업에 실패했다. 마흔 후반에 무일푼으로 LA에 와서 하숙집을 전전하다 예순을 넘어서야 방역회사로 이모작에 성공했다. “체면? 그게 뭐라고. 할 일 없어 집에서 놀 나이에 땀흘린 만큼 벌 수 있으니 행복하지.” 그를 인터뷰한 날도 35파운드 무게의 방역기를 하루종일 메고 밤 늦도록 소독을 마친 뒤였다. 칠십 인생을 물었다. “함 보자, 그기 언제고….” 경상도 사투리가 삶을 더듬었다. #부농의 ‘농띠’ 여섯째 전쟁둥이로 태어났지만 보릿고개를 몰랐다. 하동 부농의 10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아들이 없는 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가 집안의 장손이 되면서 씀씀이는 커졌다. 사업을 모르면서 벌이기만 했다. 부산에서 화장품 사업에 손을 댔지만 신통치않았다. 스물넷에 결혼했다. 당시로선 최신식 기계인 컴퓨터 프린터 대리점을 열었다. 집까지 담보잡고 온 집안 돈을 다 끌어댔지만 망했다. 교회를 다니면서 정신차리나 싶었다. “진주, 마산 두 군데서 교회용품 판매점을 했는데 잘 됐지. 넉넉하니까 또 일을 벌이고 싶더라고. 농띠(농땡이의 경상도 사투리)지 농띠.” 95년 괌에서 리조트 사업을 하자는 제안에 또 돈을 끌어다 부었다. 미국도 자주 왔다갔다했다. 그러다 IMF가 터졌다. #무일푼 LA 하숙생 98년 LA에서 무일푼이 됐다. 한국에 있던 아내와 이혼의 아픔도 겪었다. 귀국하려는데 다니던 교회 식구들이 붙잡았다. ‘가봤자 뭐할 거냐 여기가 낫다’ 다들 말렸다. LA한인타운 하숙집 친구가 페인트 현장일을 같이 하자했다. 몸 쓰는 일은 처음이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해서 하루 일당 60달러를 받았다. 그나마 운전면허가 있어서 남보다 10달러 더 받았다.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도시락 싸서 현장서 일하고 집에 돌아와 쓰러져 자기 바쁜 삶을 1년여 살았다. 그에게 탈출구를 준 건 지금의 아내다. 교인 소개로 만난 아내는 터마이트방제 회사에서 사무직원으로 일했다. “아내가 나한테 방제일을 하라고 하더라고. 자기 사장이 한달에 2만~3만불을 번다고 하는데 안믿었지. 아니 중소기업도 아니고 직원 꼴랑 2명두고 그만큼 번다는게 말이되나. 일단 일해보라고 해서 가보니 딱 나한테 맞는 일이더라고.” 2000년 나이 오십에 소독방역기를 잡았다. #벌레 잡는 이모작 인생 영어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데 라이선스를 따야 했다. 석 달 간 밤낮으로 교재를 붙잡고 달달 외웠다. 4개월만에 페스트, 터마이트 2개 자격증을 다 땄다. 삶을 바로 잡는데 신앙이 큰 도움이 됐다. 2004년 LA한인타운 마가교회(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노숙자, 마약중독자들을 돕는 사역으로 잘 알려진 교회다. 지금 그는 이 교회 장로다. 성실히 일하던 그에게 7년만인 2007년 기회가 왔다. 우연히 만난 고향 친구가 방역회사를 동업하자 제안했다. 독립하면서 사업은 날개를 달았다. 도널드 스털링 전 LA클리퍼스 구단주가 소유한 100여채 아파트, 포에버21, 플라자멕시코, ‘더 소스’ 몰 등 굵직한 고객들을 확보했다. “우린 재서비스 요청이 거의 없어, 특히 꼼꼼히 해야 하는 게 빈대, 벼룩 방제인데 다른 업체는 2~3번 해야할 일을 우린 한번에 끝내니 손님들 만족도가 높지.” #바닥 뒹구는 사장님 -일흔이다. 소독일이 힘들지 않나. “나도 직원들처럼 보호장구 입고 방역기 메고 평균 3시간 소독한다. 천장이나 지하 좁은 공간에도 들어간다. 일 끝나면 온몸이 땀에 절어 녹초가 된다. 그래도 일할 수 있어 행복하다.” -한인 업소들 방역 요청이 많다고 했다. “워싱턴주에서 한인 여성이 코로나로 사망한 뒤 주문이 폭증했다. 하루 평균 식당만 8군데 작업하고 있다. 대학, 교회, 건물까지 합하면 10곳 넘는다. 요청이 밀려서 제때 못해줘서 죄송하다.” -특히 식당들 힘들어한다. “현장에서 직접 보니 더 가슴 아프다. 식당들 피해는 상상못할 만큼 크다. 업주도 직원들도 패닉상태다. 업주들은 ‘코로나에 걸려 죽는 게 아니라 장사 안돼서 죽겠다’고들 한다.” -소독 비용은 얼마나하나. “통상 1000스퀘어피트 방역에 주류회사들은 500달러를 청구한다. 우린 가격을 100달러로 낮췄다. 다들 어려운데 어떻게 제값 다 받겠나.” -사업 어려웠을 때는. “있었겠지만 기억 안 난다. 남과 비교 안 하고 살아서그런가 보다. 욕심은 세균처럼 사람을 병들게 한다. 하루에 ‘감사’라는 말을 제일 많이 한다. 있는 것에 감사하며 산다.” -은퇴할 나이 아닌가. “원래 일흔에 그만두려 했는데 일 안 하면 더 빨리 늙을 것 같더라.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최소 5년은 더 일하려고 한다.” -인생의 고수는. “내 인생 목표가 ‘남이 안 볼 때 더 잘하자’다. 손 닿지 않는 곳까지 구석구석 소독하려고 바닥에 드러눕고 엎드려 기어가기도 한다. 한번은 업주가 업소에 없었는데도 나보고 일 꼼꼼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더라. 알고 보니 업소 내 CCTV로 내가 바닥에 뒹굴면서 일하는 걸 다 지켜봤더라. 뭐든 내 일처럼 최선을 다하면 손님을 붙게 돼있고 돈은 따라오게 돼있다.” ▶문의:(213)820-5999 조현규 사장 정구현 기자 koohyun@koreadaily.com chung.koohyun@koreadaily.com

2020-03-16

"특효약은 백신 아니라 정부·국민간 신뢰"

"공포가 낳은 분노·비난이 더 무서워" CDC 한인 역학의 단독 인터뷰 질병예방통제센터(CDC)에 비상이 걸렸다. 미국내 코로나19 확진자가 9일 오전 현재 600명을 넘어섰고 사망자는 26명에 달한다. CDC내에서 일명 ‘질병수사관’으로도 불리는 역학의학자(medical epidemiologist)인 메리 최(한국명 정원·47·사진) 박사도 분주하다. 그녀는 2012년 CDC의 역학조사관(EIS)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래 8년째 근무중이다. 현재 애틀랜타에 있는 CDC 본부 산하 고위험군출혈열바이러스 전담부서(VSPB)에서 역학조사관들을 감독한다. 그녀의 전문 분야는 치사율이 43%로 가장 높은 에볼라 바이러스다. 2014년 발병 근원지인 서아프리카 3개국에 파견됐고 미국내 감염자가 나온 댈러스·뉴욕 현장에서도 에볼라와 싸웠다. 지난해엔 나바호 인디언 거주지역에서 한타바이러스 검진 체계 설립을 지휘했다. 그녀는 지난 8년간 현장에서 목격한 전염병의 가장 무서운 점을 ‘공포의 부작용(byproduct of fear)’이라고 했다. 그녀는 “공포는 항상 분노와 불신으로 뒤틀리고 곧 비난 대상을 찾게 된다”면서 “그래서 감염자뿐만 아니라 가족들, 의료진에게도 폭력을 가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고 했다. 1976년 세 살 때 시카고로 가족과 이민 온 그녀는 조지워싱턴 의대를 나와 중증외상치료센터 응급전문의가 됐고 미 육군 군의관으로 2005년 파키스탄 대지진 등 재난 현장에서도 생명을 살렸다. 우주인 꿈꾸던 ‘C학점 소녀’ 병원 자원봉사서 의사 결심 장학금받고 8년 군의관 복무 제대후 외상센터 응급의사로 공중보건의 과정중 CDC 합류 서아프리카 에볼라 창궐시 기니서 접촉추적자 맹활약 댈러스·뉴욕 감염도 대응 ‘바이러스(Virus)’는 라틴어로 독이다. 그녀는 독을 쫓는다. 전염병 확산지역 한복판이 일터다. 질병예방통제센터(CDC)의 역학조사관 메리 최(47) 박사는 '질병수사관(disease detevtive)’으로도 불린다. ‘고수를 찾아서’ 6번째 인물인 그녀를 인터뷰하는데 2주를 기다려야 했다. CDC내 한인 역학관을 찾아야했고 어렵게 연락이 닿은 뒤에도 애틀랜타와의 시차, 바쁜 업무로 통화조차 어려웠다. 인터뷰는 이메일로 했다. 3차례에 걸쳐 40개의 질문을 보냈고, 그녀는 A4용지 11장 분량으로 자세히 답했다. 코로나19와 관련된 질문에선 답변을 미뤘다. ‘전담팀원이 아니다’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아직까지 코로나에 대해 확실한 데이터가 없어 역학자로서 답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주인 소녀, 의대 가다 1976년 세 살 때 이민왔다. 부모의 고교동창이 있는 시카고 외곽 스코키가 새 터전이었다. 부모는 청소원, 봉제공장 재단사로 일했다. 힘든 이민생활이었지만 그녀와 여동생은 사랑받고 자랐다. 모험심이 강해 우주비행사를 꿈꿨다. 존 글렌 주니어(1962년 우주궤도를 돈 미국 최초의 우주인)가 우상이었다. 하지만 공부는 썩 잘하지 못했다. 중학교 때까지 C학점 학생이었다. 도무지 덧셈, 뺄셈을 암산할 수 없었다. 고교 입학 때 학교에선 그녀를 '보충수업반’에 넣으려 했다. 일반 수업을 받겠다는 고집에 부모는 전적으로 지지해줬다. “그때 부모님이 아니었다면 평생 열등생이라는 딱지를 뗄 수 없었을 거예요. 지금의 내가 될 수 없었겠죠.” 알고 보니 산수만 어려웠고 미적분 같은 고등수학에는 뛰어났다. 고교생활중 병원 자원봉사를 하다 ‘진짜 의사’들을 만났다. "응급실 침상 시트를 바꾸는 일을 도왔어요. 어느 날 오토바이 사고 환자가 곧 도착한다는 방송에 의료진이 총출동해 대기했죠. 저는 초긴장 상태가 돼서 떨기만 했어요. 그때 결심했죠. 응급실 문 뒤 예상못할 환자를 두려워 않는 의사가 되자고.” 보스턴 대학에 진학해 인체생리학과 그리스·로마 문학을 복수전공했다. 인체를 공부하다 따분해지면 고전책을 읽었다. 조지워싱턴대학 의대에 들어갔다. ▶군의관, 재난 현장으로 조지워싱턴 의대는 학비가 가장 비싼 학교 중 하나였다. 2학년때 학비융자를 얻었는데 4만 달러가 필요했다.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길은 군대밖에 없었다. 베트남 참전군인 아버지의 무용담에 용기를 얻었다. 육군 입대가 받아들여져 남은 3년 학비를 지원받았다. 8년 복무의 대가였다. 미시간대학에서 응급의학의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고 2003년 독일로 파병됐다.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육군 이동외과병원(MASH)’ 응급의로 4년간 근무했다. 복무중 그녀는 공중보건의로 또 한번 어려운 삶을 선택했다. 2005년 파키스탄 대지진 참상 현장에서다. “무너진 건물에 깔린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외상치료전문팀을 꾸려 갔는데 전혀 상상못할 상황에 맞닥뜨렸어요. 현장엔 골절환자보다 디프테리아, 파상풍(tetanus), 홍역 등 전염병 환자가 창궐했죠. 최고 외과의사 팀원들이었지만 누구도 전염병 대처법을 몰랐어요. 허둥지둥하는 우리에게 파키스탄 현지 의사들이 치료법을 가르쳐줬죠. 공중보건의 꿈을 꾸게 된 계기예요.” ▶‘검은 강의 독’을 만나다 제대 후 고향 시카고로 돌아와 중증외상센터에서 근무했다. 재난현장이 그리워졌다. 2009년부터 컬럼비아대학 공중보건 3년 석사 과정을 거쳐 CDC의 역학조사전문(Epidemic Intelligence Service·EIS)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과정을 마치자마자 2014년 5월 평생의 숙적을 만났다. 바이러스 이름은 콩고의 에볼라강에서 따왔다. 현지어로 '검은 강’이라는 뜻이다. 서아프리카 기니로 파견할 현장 요원이 당장 필요하다기에 지원했다. 현장에선 ‘접촉추적자’로, 의사로 1인2역을 했다. 감염은 무섭게 확산했다. “침상 놓기도 좁은 진료실에서 현지 의사는 환자를 만진 손으로 청진기를 만지고 각종 서류를 뒤지고, 펜을 집었다가 놨다가 했죠. 개인보호장비(PPE)와 소독약이 구석에 있는데도 먼지만 쌓여있었어요. 답답한 상황이었어요.” 즉시 유증상자 구별 시스템과 감염 예방 조치를 가르쳤다. 특히 현지 의료진에 장갑을 제대로 벗는 법을 가르치는데 주력했다. 일단 장갑을 끼고나면 아무것도 만지지 않았어도 병원체가 묻어있다고 가정해야 했지만 소귀에 경 읽기였다. 고민하다 진료소 마당 흙바닥에 물을 부어 진흙을 만들고 장갑 낀 손을 문질러보라 했다. 그런 뒤에 진흙을 손에 묻히지 않고 장갑을 벗어보라 했다. 그제야 ‘감염’을 이해했다. 그녀가 한 조치는 아직도 CDC 직원의 교육자료로 쓰인다. 그해 10월 에볼라가 미국 내 댈러스와 뉴욕으로도 퍼지자 그녀는 또 현장으로 불려가 확산을 막았다. 이후로도 몬로비아, 라이베리아에서 바이러스를 쫓고 치료했다. ▶질병 추적 수사관 -또 다른 바이러스가 창궐 중이다. 백신이 언제 개발될 지 궁금해 한다. “전염병에는 특효약(silver bullet)이 없다. 2014년 에볼라 창궐 당시엔 없었던 수많은 혁신적 치료법이 등장했지만 에볼라 감염환자는 여전히 나오고 있다. 사람들은 최신 백신에만 집착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열쇠는 정부, 의료진, 주민간의 신뢰다. 사회적 협력 없이 신기술만으로는 확산을 막을 수 없다.” -2014년 댈러스의 에볼라 감염 사태의 교훈은. “가장 힘들었던 경험 중 하나다. 텍사스 장로병원의 간호사 2명이 에볼라에 감염됐다. 서아프리카에서 온 에볼라 최초 감염자인 남성 환자를 돌보다가 전염됐다. 현장에 가보니 분위기는 극도로 험악했다. 200여명의 의료진은 모두 겁에 질려있었다. 공포는 곧 분노와 불신(mistrust)으로 뒤틀렸다. 전염병이 확산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항상 이런 식으로 번진다. 어김없이 비난 대상을 찾아 누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따진다. 그 와중에 언론들 역시 위기 상황을 진정시키는데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다.” -누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찾아야 하지 않나. “CDC의 역할은 비난 대상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감염의 뿌리부터 전 과정을 분석해 재발을 막는다. 대개 전염병 확산 원인은 한두 가지가 아니라 모든 경로에 있다.” 댈러스의 에볼라 사태 원인도 복합적이었다. 감염자, 공항, 병원, CDC 모두에 과실이 있었다. -어떻게 대처했나. “일단 감염 병원 내 의료진들의 진료 행위를 관찰했다. 추가 감염을 예방하고 비슷한 사태 발발시 실수를 막기 위해서다. PPE 장비를 입고 벗는 법부터 다시 교육했다. PPE 착탈의엔 30단계 정도 확인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제대로 하는 이가 없었다. 한 간호사는 착탈의에 문제가 없었지만 손 씻을 때 왼쪽 손등만 씻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 -응급전문의다. 총상 환자를 많이 접했을 텐데. “미시간의 플린트라는 도시에서 레지던트를 밟을 때였다. 미국 내 총기 살인율이 가장 높은 곳중 하나였다. 복수가 복수를 부르는 악순환을 겪었다. 주행총격을 당한 남성이 사망했다. 가족중 한 남자가 미친듯이 화를 내더니 ‘가만두지 않겠다’고 뛰쳐나갔다. 두시간 뒤 라이벌 갱단의 남성이 총격을 당해 실려왔다. 기관총을 쏜 것이 분명했다. 시신에 난 총상을 40개까지 세다가 포기했을 정도였다.” -끔찍한 상황에 적응하기 어렵지 않나. “ER이나 재난 현장에서 일하는 의사들은 환자와 거리를 둬야 한다. 감정 개입이 되면 결정을 주저하게 된다. 나도 전염병 환자는 주저없이 치료하지만 우리 아버지 페니실린 처방을 못한다. 과민성쇼크가 오면 어쩌나, 예방책으로 또 다른 약을 처방해야 하나 등등 3시간 동안 고민만 했다.” -훌륭한 의사란. “겸손(humility)하고 정직해야 한다. 어느 환자나 신뢰할 수 있는 의사를 원한다. 병에 대해 뭔가 알았을 때, 심지어 모른다는 사실조차 환자에게 솔직히 말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좋은 의사는 경청하는 사람이다.” ■메리 최 약력 ▶1973년 서울 출생 ▶1976년 시카고로 가족 이민 ▶보스턴 대학 인체생리학 ▶조지워싱턴 의대·미시간 의대 레지던트 ▶육군 군의관 복무(독일, 프랑스, 파키스탄 파병) ▶시카고 사우스사이드 병원 중증외상센터 전문의 ▶컬럼비아의대 공중보건학 석사 ▶질병통제예방센터 역학조사 전문요원(EIS) 수료 ▶서아프리카 에볼라 대응 (기니, 라이베리아, 몬로비아 등) ▶국내 바이러스 역학조사(댈러스·뉴욕 에볼라 감염 대응, 미네소타 라사열 대응) ▶CDC 애틀랜타 본부 고위험군출혈열바이러스 전담부서(VSPB) 유행병치료학자, 역학조사관 감독관 정구현 기자 koohyun@koreadaily.com chung.koohyun@koreadaily.com

2020-03-09

만능열쇠 없다…인생도 그렇다

18세때부터 60년 열쇠 외길 ‘중정’에 열쇠따기 교재 납품 월남전 미군부대 기술자 근무 72년 이민…‘베스트열쇠’ 운영 "맞는 열쇠 끈기있게 찾아서 고객 마음 열수 있어야 고수" “청진기로 소리들어서는 금고 못열어. 영화에서 나오는 건 다 설정이지.” 질문이 무색할 정도로 답변은 단호했다. ‘베스트 락&세이프 서비스’ 김대석(77) 사장은 열쇠의 명인이다. 한국에서 열여덟살때 열쇠를 배워 올해로 60년째 한길만 걷고 있다. LA에서만 반세기 가까이 열쇠수리공으로 살았으니 한인사회 산증인이기도 하다. 그는 60년간 열쇠를 한 덕분에 인생을 무리없이 열었다고 했다. 가늠못할 세월은 그의 열쇠가게 내부 어디에나 있다. 300여개의 금고가 쌓여있고 40~50년된 열쇠, 자물쇠 부속품이 한쪽 벽을 가득 메우고 있다. “저게 다 내 인생이지. 허허….” 15년전부터 가업을 잇고 있는 아들 로렌스(47)씨도 따라웃었다. 열고 닫고 고치고 깎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 한국, 열쇠를 깎다 열쇠는 자연스러운 밥벌이였다. 두살 위 형이 서울에서 열쇠공장을 했다. 장난감처럼 열쇠를 가지고 놀았고 자물쇠를 분해하면서 혼자 원리를 배웠다. 군 제대 후 을지로 5가에 열쇠가게를 열었다. 얼마안가 ‘솜씨 좋은 열쇠집’이라는 입소문이 퍼졌다. 그러던 어느날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나라’에서 일한다는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이었어. 자물쇠 따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나보고 도와줄 수 있겠냐 묻더라고. 알고보니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 사람이었지.” 60년대 국민들에게 ‘중정’은 잡혀갈까 무서운 곳이었지만, 그에겐 기회의 창구였다. 중정 요원들을 위해 ‘해정구(열쇠따는 도구)’를 만들어주고 실습용 자물쇠, 금고를 제작해 납품했다. 경찰학교에서도 같은 부탁을 해왔다. 이제 을지로는 좁았다. # 다낭, 금고를 지키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68년이었다. ‘파월 기술자 모집’ 신문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다낭의 미군 부대서 일할 금고기술자 1명을 뽑는다했다. 월급은 800달러였다. 원화로 24만원 정도다. 당시 공무원 월급이 2만원, 연탄이 20원 하던 시절이다. 큰 돈을 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29명이 지원했는데 별 어려움 없이 뽑혔다. 면접관이 그가 납품한 교재로 ‘열쇠따기’를 가르친 경찰학교 간부였다. 스물여섯 총각이었으니 움직이기도 단촐했다. “베트남에 가보니 미군 부대에는 기밀서류나 달러를 보관하는 금고들이 많았어. 한번은 수리했던 금고 내부에 3개 벽면이 달러로 가득한 박스들이 쌓여있더라구.” 3년만인 71년 귀국했다. 다시 을지로로 돌아와서 ‘서울 철물점’을 인수했다. 그런데 열쇠 기술자들 사이에서 미국 이민바람이 불었다. 베트남에서 본 미국의 고급 물자들이 눈에 선했다. 비자를 신청했다. 1년만에 열쇠수리공 비자를 받았다. # 미국, 성공을 열다 72년 6월15일 팬암 항공기로 하와이를 경유해 워싱턴 DC에 내렸다. 주머니에 든 2000달러가 전재산이었다. 호텔에 짐을 풀고 비자 스폰서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너무 늦었네요. 이미 다른 사람을 고용했습니다.” 어쩌나 싶었는데, 전화기 옆 옐로페이지가 눈에 들어왔다. 무작정 몇군데 전화를 걸어 일자리를 찾는다 했다. ‘슈어피트 락스미스’ 회사에서 기회를 줬다. 이튿날 면접갔더니 그날부터 일하라 했다. “1년 정도 DC에 있었는데 춥고 비오고 날씨가 싫었어. 캘리포니아는 따뜻하고 돈도 더 벌 수 있다는 말에 별 고민없이 서쪽으로 대륙횡단을 했어.” 69년형 셰피 임팔라 중고차를 몰고 매일 800마일씩 운전해 꼬박 나흘만에 LA에 도착했다. 73년이었으니 한인타운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던 시절이다. 피코와 크렌쇼 부근의 모텔에 짐을 풀었다. 연고 하나 없이 무작정 왔지만 두렵지 않았다. 그에겐 ‘옐로페이지’가 있었다. “락스미스 회사 몇군데 전화를 돌렸지. 그날 바로 백인여자가 사장인 ‘애로우 키 서비스’에 취직됐어.” LA에서도 돈 벌기는 쉬웠다. 세금을 제외하고 매주 350달러씩 받았다. LA 원베드룸 월세가 100달러 하던 때다. 5년만인 78년 첫 가게를 차렸다. 올림픽과 웨스턴 부근이었다. “그때 한인 열쇠기술자는 작고한 김윤통 사장하고 나하고 두명 정도 밖에 없었어. 경쟁하기 보단 서로 도우면서 일했지.” LA폭동 전년도인 91년 베니스와 웨스턴 인근 건물을 매입해 30년 가까이 ‘열쇠집’을 지켜왔다. # 인생이라는 자물쇠 -열쇠란. “자물쇠에 맞는 열쇠 짝은 하나밖에 없다. 맞지도 않는 열쇠 아무리 돌려봐야 문 안 열린다. 내 인생을 열어준 열쇠는 열쇠수리공 일이었다. 나한테 딱 맞는 일을 찾아 해야 행복하다.” -뭐든 다 열 수 있나. “아직도 못여는 것들 있다. 얼마전에 100년 넘은 금고를 여는데도 진땀뺐다. 90% 정도는 열 수 있다.” -만능열쇠가 있나. “뭐든 다 열 수 있는 열쇠는 없다. 호텔이나 아파트에서 쓰는 ‘매스터키’도 자물쇠에 맞춰서 만든 열쇠다.” -청진기로 금고 못연다고 했다. “가끔 할리우드 영화 제작진이 찾아와서 청진기 대고 열 수 있는 금고를 만들어달라한다. 현실에선 금고 다이얼 주변에 드릴로 구멍을 뚫어서 연다. 홈이 일직선으로 맞는 ‘드릴 포인트’를 찾아야 하는데 금고마다 다 달라서 경험으로 아는 수 밖에 없다.” -가장 열기 어려운 건. “보석금고다. 금고 안쪽 잠금장치 뒤에 유리판이 있는데 드릴로 뚫다가 유리판이 깨지면 안전핀이 작동해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도둑들이 금고 앞면이 아니라 옆면 혹은 뒷면을 용접기로 자르거나 뚫는다.” -기억에 남는 일화는. “혼자 사는 가족이 전화안받는다고 문 열어달라 할 때가 종종 있다. 열어주면 어김없이 안에 들어간 가족의 통곡소리가 들린다. 변을 당했거나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한거다. 돈 안받고 조용히 나온다. 또 경찰 의뢰도 들어온다. 다운타운 한 사무실에서 금고를 열어줬는데 마약이 가득 나왔다.” -튼튼한 금고 추천한다면. “바닥에 파묻는 금고(floor safe)가 가장 안전하다. 보통 도둑들이 금고를 통째로 들고가는 경우가 많다. 파묻는 금고는 주변에 콘크리트를 부어 고정시키기 때문에 파갈수도 없다. 주택·아파트 대문 자물쇠는 ‘메데코(Medeco)’가 좋다. 쇠 자체가 견고하다. 또 보통 열쇠는 높낮이만 깎는데 메데코는 비스듬하게 각도까지 넣는다. 열쇠따는 도구로는 99% 못연다.” -고수는 어떤 사람인가. “최고의 열쇠장이는 뭐든 열어줘야한다. 무조건 부술게 아니라 끈기있게 맞는 열쇠(해답)를 찾는 사람이다. 성실한 노력으로 고객의 마음을 열 수 있어야 한다.” ▶문의:(323)733-7716 정구현 기자 chung.koohyun@koreadaily.com

2020-02-24

할리우드서 20년, 빛을 조각하다

17세때 이민…의대 공부하다 할리우드 사관학교 AFI 졸업 그레이아나토미·배트맨 등 2000년부터 400여편 참여 “상대를 비추면 본인도 빛나 자기 위치를 아는 이가 고수” 마치 한국축구대표팀의 월드컵 경기를 시청하듯 봉준호 감독의 오스카 수상에 함성을 지르면서 4번째 고수를 정했다. 할리우드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의 사람들이 궁금했다. 김기표(영어명 Kaiser ‘Kai’ Kim·48) 조명감독은 적임자였다. ‘할리우드의 사관학교’로 불리는 ‘미국영화연구소 영화학교(AFI Conservatory)’ 출신인 그는 할리우드 현장 바닥부터 시작해 20년간 400여편의 영화·드라마 제작에 참여했다. 그레이 아나토미, NCIS, CSI, 웨스트월드 등 시청률 최고 드라마를 비롯해 영화 다크 나이트(2008년), 스티븐 스필버그 제작 수퍼 8(2011년), 줄리아 로버츠 주연 홈커밍(2019년) 등이 그가 빛낸 작품들이다. 새벽부터 하루종일 촬영한 날 저녁에 만났다. 지친 그에게 '빛'을 묻자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Scene #1 빛이 켜지다 1989년 시카고로 이민왔다. 모범생이었고 의사를 꿈꿨다. 누나는 소아과, 바로 위 형은 치과의사다. 일리노이 주립대 생물학·화학 복수전공으로 입학했다. ‘영웅본색’ 세대들이 다 그렇듯 느와르 영화를 즐겨봤다. 그래도 영화판에 뛰어들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러던 2학년때 가슴에 뜨거운 불이 켜졌다. “단편영화를 찍는데 아르바이트생이 필요하다는 우연한 기회였어요. 5일간 잠도 안자고 뛰어다녔죠. 촬영이 끝나고 집에 왔는데 가슴이 뜨겁고 열이 났어요. 눈 감으면 촬영현장만 보였죠. 나중에 할리우드에 와서 들었는데 그런 증세를 ‘쇼비지니스 버그에 물렸다(Show business bug bites)’고 해요. 3개월간 끙끙거리다 ‘영화를 하자’ 결심했죠.” Scene #2 빛을 배우다 부모님을 설득하는 건 쉽지 않았다. 누나의 적극적인 지원사격이 힘이 됐다. 콜럼비아 칼리지 필름학과로 편입했다. 공부를 하면할수록 영화감독 일보다는 조명이 매력적이었다. 더 배우고 싶었다. 졸업 후 학창시절을 보낸 시카고를 떠나 할리우드로 왔다. 99년 AFI에 입학했다. AFI는 한해 촬영감독, 영화감독, 미술, 극작가 등 6개 학과에서 140명 소수정예만 뽑는다. 매 학년때마다 작품으로 실력을 입증못하면 퇴학당한다. “AFI는 할리우드의 축소판이라고 해요. 철저하게 실용적이죠. 예를 들어 졸업반은 각자 촬영팀을 꾸려야하는데 6개 학과생들이 서로 협업을 해야해요. 팀에 소속되지 못하면 작품을 찍을 수 없으니 학교를 그만둬야 해요.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네트워킹을 못하면 할리우드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가르치는 거죠.” Scene #3 빛과 그림자 좋은 학교를 나왔으니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그런데 현실은 ‘배고픈 조명지망생’이었다. 할리우드 장벽은 높고 단단했다. 식당 웨이터, 바텐더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앞이 깜깜하던 때에요. 99년 당시 로스펠리츠 지역에 스튜디오 아파트 월세가 400달러였는데 매달 그 돈만 벌면 ‘아파트에서 쫓겨나지 않겠구나’ 안심했죠. 그게 한심했어요.” 암흑속에서 한줄기 빛은 구원이다. 배우 윌 스미스가 제작자인 영화 ‘시트 필러(Seat Filler·2002년작)’가 빛이었다. 영화를 찍으면서 할리우드 조명노동조합 ‘IATSE LOCAL 728’에 들어가게 됐다. 노조원 5000명중 1.5세 한인은 그가 최초였다. 지금도 한인 노조원은 10명 정도다. 노조원은 안정적으로 작품에 참여할 수 있다. 평균 연봉은 비노조원의 2배다. 밥 걱정 없이 빛을 가지고 놀 수 있게 됐다. Scene #4 빛을 따라서 -빛이란 무엇인가. “사물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 빛이 없어 우리가 못볼 뿐이다. 백만불짜리 피사체도 빛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또, 싸구려 피사체는 빛 앞에서 본질을 숨길 수 없다. 사물의 실체를 인간이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빛이다.” -조명감독의 일은. “빛을 조각해 스토리를 만든다. 현장에서 영화감독의 주문은 대부분 추상적이다. 예를 들어 ‘암울한 느낌’을 내달라고만 한다. 밤의 암흑은 낮의 어두움과 다르다. 그 차이를 화면에서 느낄 수 있도록 빛을 조작해 질감을 만들고, 컬러를 입힌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드라마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2011년 방영된 시즌1 참여)’는 힘들었지만 평가가 좋았다. 특히 강도높은 살인 장면에 공을 많이 들였다. 50~60년대풍를 재현하면서 느와르(Black) 분위기를 컬러로 입혀야 했다. 조명기 하나하나를 3cm, 5cm 옮겨가며 시신에 빛이 묻는 앵글을 극대화시키려 노력했다. 큰 경험이 됐다.” -봉준호 감독 수상봤나. “시상식 때 난 광고를 찍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높은 콧대를 잘 알기에 봉 감독의 수상을 예상못했다. 그런데 광고를 찍던 모든 스텝들이 갑자기 박수를 치더라. 작품상을 받을 때였다. 그 다음날 할리우드 드라마 촬영현장에 갔더니 난리가 났다. 내가 상받은 것도 아닌데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다들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영화 한편의 승리라기 보단 한국의 승리다.” -할리우드와 한국의 제작현장 차이점은. “2002년 개봉한 한국의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 ‘H(지진희·염정아 주연)’에 촬영기사로 참여했었다. 그때 느꼈던 한국 영화인들의 열정은 무서울 정도였다. 할리우드의 최대 장점은 막대한 투자금이다. 작년 개봉한 영화 ‘홈커밍’에 조명을 맡았다. 한 장면에 쓸 세트장 1개에 조명 설치비만 350만달러를 썼고 3주가 걸렸다. 딱 하루 촬영하고 세트장을 부쉈다.” -스포트라이트 뒤에만 있다. 조명 앞에 서고 싶지 않나. “되묻고 싶다. 내 덕분에 상대가 칭찬을 받는데 좋지 않은가. 누군가를 빛나게 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상대를 밝혀주면 나도 빛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꿈은. “오스카에서 촬영상을 받는 감독이 내 이름을 부르며 ‘고맙다’고 한마디 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할 거 같다.” -인생에서 고수란. “현재 같이 작업하는 로저 세슨이라는 조명감독에게서 새삼 배운게 있다. 조명의 위치다. 어디까지가 내 역할인지 자기 위치를 아는 사람, 상대의 역할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정구현 기자 chung.koohyun@koreadaily.com

2020-02-17

[스토리 In] 고수를 기다리는 이유

진짜 고수들을 만나고 싶었다. 유명한 재력가나 박사보다 숨어서 노력하는 장인이 주인공이어야 했다. 지난달부터 시작한 주간기획 ‘고수를 찾아서’라는 인터뷰 시리즈의 의도다. 고백하자면 기사는 4년간 ‘깔고 앉았던'글이다. 아이디어 초안은 2016년 5월16일 노트북에 저장한 ‘기획리스트’라는 워드파일에 적었다. 애초 시리즈의 큰 제목은 ‘꾼의 세계’였다. 워드파일에 적혀있는 30개 이상의 꾼들을 옮기면 이렇다. ‘파수꾼(경찰, 소방관), 살림꾼, 낚시꾼, 장사꾼, 소리꾼, 춤꾼, 논쟁꾼, 삼꾼(심마니), 웃음꾼(개그맨), 그림꾼(화가), 요리꾼(셰프)….’ 말의 근원을 파고들면 묵직한 기사였지만 글을 풀어갈 자신이 없었다.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는 꾼의 나쁜 어감을 지울 방법을 찾지 못해서다. 4년 만에 다시 파일을 열었는데 여전히 끙끙거렸다. 결국 풀기 어려운 ‘꾼’을 포기했다. 쓰기 쉬운 ‘고수’를 택한 것은 글꾼이 되지 못한 하수의 변명이다. 지금까지 4명의 한인 ‘꾼’들을 만났다. 검도 5단의 24년차 베테랑 형사, 컴퓨터 공학도를 꿈꾸는 미국 바둑 랭킹 1위 청년과 이야기했다. 마라토너인 LA 1호 커플 매니저와도 마주 앉았다. “빛을 조각한다”는 20년차 할리우드 조명감독 이야기도 썼다. 다른 분야의 이들에게 같은 질문을 하나했다. ‘인생에서 고수란?’이다. 표현은 달랐지만 말은 같다. ‘주제 파악’이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아직 고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24년 베테랑 형사도 “아직도 매일 출근 때마다 신참처럼 가슴이 뛴다”고 했다. 또 미국 바둑 1등도 “이제 겨우 돌 몇개를 뒀다"고 겸손해 했다. 고수들의 말대로라면 스스로 고수라고 생각하는 이는 착각에 가깝다. 최근 한 한인단체에 자칭 고수라 여기는 이들이 기웃거린다는 말을 들었다. 얼마전 만난 한인 단체장 A씨는 고민이 많아 보였다. 본인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마땅한 후임자가 없어 걱정이란다. 회장하고 싶어하는 ‘자칭 고수’들은 많은데 '깜'이 되는 숨은 고수는 아직 못찾았다고 했다. B씨는 재력은 있지만 시니어여서 ‘세대교체’라는 방향성에 적합하지 못했다. C씨나 D씨도 참신한 인물과는 거리가 멀다. A씨는 ‘올해'라서 후임 걱정이 더 된다고 했다. 2년 전 한인들은 대규모 시위를 통해 LA시장, 담당 기관장, 지역구 의원을 크게 꾸짖었다. 협의 한번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노숙자 셸터를 타운에 짓기로 한데 대한 반발이었다. 시위의 규모와 횟수에 놀란 정치인들은 셸터 건설안을 원점부터 재검토했다. 한인사회 공분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성공 여부는 올해 선거에 달려있다. 유권자를 무시하고, 개발업자들과 유착해 뒷돈을 받고, 꺼림칙한 추문이 항상 뒤따라 다니는 정치인들을 솎아내야할 때다. 큰 변화를 이끌 한인들의 참여 동력은 각 단체들의 협심에서 나온다. 그러니 올해 후임자는 ‘회장’보다는 ‘공복’이 필요하다는 A씨의 고민은 맞는 이야기다. 이 단체처럼 리더 구인난을 겪고 있는 단체들과, 스스로 리더가 되길 원하는 이들에게 김기표(48) 조명감독의 조언을 들려주고 싶다. 그는 서로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는 촬영 현장에서 20년째 남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고 있다. 본인이 조명을 받고 싶은 욕심이 있는지 물었다. “아무리 멋진 피사체라도 빛이 없으면 존재해도 보이지 않는다. 상대방을 밝혀줘야 나도 빛날 수 있다.” 지금 한인사회는 스스로 주인공이 되려는 ‘하수’보다 멋진 주인공을 만드는 고수가 절실한 때다. 진짜 고수들을 만나고 싶다. 정구현 선임 기자 chung.koohyun@koreadaily.com

2020-02-17

“휴대폰 끄고, 스쳐가는 인연 잡아라”

LA 커플매니저 1호…21년차 300쌍 맺어준 ‘연애의 고수’ 여성은 남성 재력보다 외모 남성은 똑똑한 여자를 선호 "사랑의 최고 기술은 터치 고수는 짝만나 완성되는 이" 연애의 ‘연(戀)’은 애가 타는 글자다. 그립다, 사모하다, 사랑하다, 잊지못하다라는 간절한 뜻이 이어지다가 ‘차마 헤어지지 못하다’는 미련마저 품는다. 그 복잡한 감정과 감정 사이에서 ‘연’은 맺어진다. 세번째 고수는 ‘연인’을 만드는 사람이다. LA 최초 커플 매니저이자 결혼정보회사 듀오USA 지사장 제니퍼 이씨다. 14일은 밸런타인스데이다. ‘연애의 고수’를 만나기 좋은 때다. “운동하고 곧장 출근하는 바람에 화장도 제대로 못했어요.” 연애 고수는 머리 매무새를 만지며 쑥스러워했다. 골프나 수영을 예상했는데, 10년차 마라토너라고 했다. “백두산이 폭발하듯 아랫배가 나오는 바람에” 뛰기 시작했단다. 조깅하듯 뛴 지 1년 만인 2012년 LA마라톤을 첫 완주했다. 그후 뉴욕, 시카고, 보스턴 등 전국의 유명마라톤 대회서 40여 차례 결승점을 통과했다. 26.2마일(42.195km)은 꾸준해야 완주한다. 매주 화·목요일에 새벽 이슬을 맞으면서 10마일을 뛴다. 안 뛰는 날은 요가를 한다. 역시 전문가급이다. 출근 전, 퇴근 후 합쳐 5시간 이상 땀을 흘린다. 운동 이야기부터 늘어놓는 이유가 있었다. “연애도 마라톤처럼 포기 말고 꾸준히 달려야 해요.” 듣고 싶었던 ‘사랑 이야기’가 시작됐다. -LA 1호 커플 매니저다. “배추사러 갔다가 21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 마켓에서 배추를 고르는데 바닥에 깔린 신문 광고에 ‘커플 매니저 구함’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당시 은행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재미있겠다 싶어 지원했다. 듀오가 미국에 진출한 1999년이었다. 지사장과 단 둘이서 시작했다.” -20년간 업계 변화는. “10년전까지만 해도 결혼회사가 10여개가 넘을 정도로 성업이었다. 부동산 회사처럼 각 지역 담당 커플 매니저까지 있었지만 지금은 다 문닫고 듀오만 꿋꿋하게 남았다.” -그때와 지금, 회원들은 어떻게 달라졌나. “당시엔 여성회원이 다수였지만 요새는 남성이 6:4 정도로 많다. 또 지금은 1.5세, 2세가 절대 다수다. 다들 좋은 직장에서 일하고 개성이 뚜렷하다. 예전엔 여성들이 남성의 재력과 학벌을 봤지만 이젠 외모, 성격, 취미를 더 중요시한다. 아무리 돈많고 좋은 대학 나와도 호감 안가면 안본다. 남성들도 변했다. 예쁜 여자보다 똑똑한 여자를 더 좋아한다. 맞벌이 상대를 찾고 한국에서 신부를 데려오려는 경우는 소수다.” -결혼 연령은. “요즘 초혼은 일찍하든가 늦게하든가다. 그래서 35세 전후 남성들이 고민이 많다. 주변에 노총각 형님들이 너무 많아 자기들도 결혼 못할까봐서다. 본인이 장동건도 아니고 재벌 2세도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정작 연애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하나하나 코치해줘야한다.” -어떤 걸 가르쳐주나. “예를 들면 첫 만남에서 상대에게 뭘 물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미국온 지 얼마나 되셨나요' 같은 시답잖은 질문은 하지 말라고 한다. 듀오의 이번 밸런타인스데이 이벤트 참가자들에겐 아예 질문지를 마련해줬다. ‘내 첫인상 어때요’, ‘친구들이 당신의 어떤 면을 최고라고 하나요’, ‘요즘 빠져있는 것은’ 같은 돌직구 질문이다.” -남성들에게 조언한다면. “적극적으로 대시해라. 여성은 자신감있는 남성을 좋아한다. 휴대폰 꺼라. 평생의 인연을 만나는 것보다 중요한 일 많지 않다. 바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면 상대는 연락 안한다. 눈맞춤 많이하라.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상대 시선을 내 눈안에 잡아두라.”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쑥스러워 하지 마라. ‘부모님, 친구 등쌀에 억지로 끌려나왔다’는 말 하지마라. ‘할렐루야’ 신앙 이야기 많이 하지 마라. 키 작고 통통해 고민이라면 만날 때 되도록 앉아있어라. 내 약점 감추고 매력만 발산하면 된다. 남자들은 단순해서 매력에 빠지면 약점은 잊는다. 연봉 많다고 자랑하지 마라. 남자들은 주눅든다. 잘 웃어라. 자연스러운 미소는 기억에 오래 남는다.” -몇쌍이나 결혼시켰나. “300쌍 정도? 15년째 감사편지와 선물카드를 보내오는 커플도 있다. 이 직업은 보람이 크다.” -재혼 풍속도는. “아휴~. 재혼은 너~무 머리 아프다. 연령층이 젊어지고 있다. 남자들은 안정을 찾기 위해 재혼을 서두르지만 여자들은 굳이 서두르지 않는다. 그래서 남성들은 재혼에 인내가 필요하다. ‘삼혼’을 원하는 70대 시니어 회원도 있다. 재혼 성사율이 높은 연령대는 65~75년생, 45~55세 사이다.” -힘들었던 경험은. “엉뚱한 오해를 받은 적이 있다. 남성 회원께 좋은 짝을 소개하려 최선을 다했는데 내가 본인에게 관심이 있다고 여기셨나보다. 내 진심이 상대방에겐 다른 진심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데이팅 앱’이 많다. 사업에 타격은 없나. “오히려 도움이 된다. 앱에 실망해서 듀오를 찾아온 회원들이 꽤 된다. 앱으로 만난 상대는 유령을 만나는 느낌이라고 하더라. 검증 안된 상대니 위험하기도 하다. 듀오는 회원들의 신원을 철저하게 확인한다. 신뢰할 수 있다.” 듀오의 회원 검증 작업은 까다롭다. 가입신청서는 5장 분량이다. 질문이 빼곡하다. 기본 신상정보에 추가되는 질문들이 많다. 예를 들어 한국어 구사 수준, 부모 자산규모, 학비 융자여부에 정자·난자를 냉동해놓았는지도 묻는다. 또 마지막 데이트가 언제인지, 왜 실망했는지도 자세히 묻는다. -회원수는. “700여명이다. 스물 한살부터 70대 시니어까지 다양하다.” -커플 매칭 노하우는. “종교, 혈액형까지 본인의 희망을 최대한 맞춰준다. 나만의 매칭 노하우는 출생 계절이다. 겨울에 태어난 사람은 여름 출생자와, 가을은 봄과 잘 맞는 경향이 있더라.” -연애 못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상대방에 대해 기대치가 높다. 모든 조건 맞는 사람 없다. ‘이상형’ 고집 버려라. 상대방에게 내가 이상형인지 생각해보라. 또, 상대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하지 마라. 남녀는 언어와 생각이 다른 종족이다. 서로 달라서 함께 살 수 있는 것 아닌가.” -인연이란. “기회다. 매일 수많은 인연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간다. 내 사람은 그 중에 있다. 꽉 잡아라.” -사랑의 최고 기술은. “터치다. 만지고 토닥이고 안아주고…. 진솔한 감성적, 육체적 교감이다.” -연애의 고수란. “흔히들 말하는 연애 고수는 결혼하기 어렵다. 자기가 잘난 걸 본인이 알아서 문제다. 어떻게 ‘작업’을 하면 상대가 넘어올지 안다. 그런데 그러다가 자기 꾀에 빠지기 쉽다. 진정한 연애의 고수는 하나쯤은 채울 것이 있는 부족한 사람이다. 짝이 있어 완성되는 사람이 사랑의 고수 아닐까.” ▶문의:(213)383-2525 듀오USA 정구현 기자 chung.koohyun@koreadaily.com

2020-02-08

‘미생’ 바둑영재, 미국 최고수가 되다

미 바둑 랭킹 1위는 23세 한인 대학생 '수가 높은'고수는 바둑판에서 가장 잘 어울린다. 연재 인터뷰를 준비하면서부터 바둑 고수를 두 번째 대상으로 점찍었다. 첫 번째로 소개하면 뻔한 '행마(말을 쓰거나 세력을 펴서 돌을 놓는다는 뜻)’로 보일 것 같아서였다. 두 번째인 만큼 바둑 고수는 의외의 인물이어야 했다. 나이 지긋한 시니어의 인생 바둑을 논하는 인터뷰는 '하수의 패'였다. LA한인타운 기원들에 수소문했다. 서울기원의 이성철 원장이 ‘무서운 고수’를 소개해주겠다 했다. 점심때를 넘겨 서울기원을 찾았다. 고수는 ‘의외성'에 금방 눈에 띄었다. 10여 명의 백발 성성한 어르신들 틈에 아직 여드름도 가시지 않은 앳된 대학생이 앉아있었다. 이상협(23·사진) 아마 7단이다. 동네바둑의 고수쯤으로 생각했더니 악수중의 악수였다. 한국의 바둑 영재였던 그는 2014년 열여덟 살에 유학왔다. 그해 최대 규모 대회인 ‘US 오픈’에서 우승컵을 거머쥐면서 미국 바둑계를 제패했다. 지금까지 미국바둑협회(AGA·American Go Association) 현역 랭킹 1위를 지키고 있다. 미국 바둑의 최고수를 만났다. 초등 6학년 때 전국 대회 우승 한국기원이 키운 연구생 출신 프로 입단대회서 뼈아픈 패배 LA 유학와 최대규모 대회 우승 5년간 미국바둑협회 ‘랭킹 1위’ 컴퓨터 전공…가을 편입 준비 5년 전 열여덟 살에 미국 바둑 최고수가 된 이상협(23) 아마 7단에게 ‘인생 바둑’을 물었다. 바둑 문외한인 기자에게는 용어 배우기도 벅찼다. #귀(바둑판의 사방 구석, 가장 중요한 지역)에 첫수 일곱 살 때다. 아버지와 장기 두는 것을 좋아했다. 우연히 장기판을 뒤집었더니 바둑판이 나왔다. 가로·세로 19줄, 361개 교차점에 어린 소년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며칠 뒤 아버지를 졸라 바둑학원에 갔다. 첫날부터 수 읽기의 매력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재미로 바둑돌을 놓던 아이는 마포초등학교 6학년 때 덜컥 전국대회서 우승을 했다. “승부욕이 강했어요. 어린 마음에 '내 바둑이 좋구나’ 우쭐해져서 바둑 프로가 되자 결심했죠.” 중학교에 입학한 이듬해 그는 한국기원의 연구생이 됐다. 미생의 시작이다. #미생(독립된 두 집이 없어 생사가 불분명한 돌) 연구생은 프로를 꿈꾸는 바둑 영재를 양성하는 한국기원의 사관생도 제도다. 연구생이 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다. 매년 4차례 선발전을 여는데 전국 바둑 꿈나무 중 40명 정도만 새내기 연구생 자격을 얻는다. 연구생 된 후엔 더 험난한 길이 기다리고 있다. 정원 128명인 연구생들은 실력순으로 6개 조에 배정돼 매주 리그전을 치른다. 승패의 결과는 냉정하다. 1등부터 128등까지 벽에 붙는다. 최하위 10명은 탈락해 그만둬야 한다. 그리고 연구생 선발전에서 새로 뽑힌 10명이 대체한다. 살아남았다 해도 19세가 되기 전 프로 입단대회에 통과하지 못하면 짐을 싸야한다. 입단대회는 매년 한번 열린다. 연구생과 일반인 지원자 등 200여 명이 응시해 고작 5명만 뽑힌다. ‘최고 중의 최고’ 2%만 한국에서 ‘바둑 프로’로 불릴 수 있다. “연구생들은 학교를 그만두고 하루종일 바둑만 둬요.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밥 먹고 화장실가는 시간을 빼고 다 바둑 공부하는 시간이죠. 휴식이라곤 가끔 일요일에 극장 가서 영화 한 편 보는 게 전부였어요.” 고등학교 3학년까지 연구생 생활을 했다. 128명 중 평균 15위 정도였으니 성적은 우수했다. 그런데 ‘곤마’의 형국이 찾아왔다. #곤마(심하게 공격당하거나 둘러싸여 살기 힘든 딱한 처지) 성적은 좋았지만 입단 시험은 넘지못할 벽이었다. 불완전한 미생에 위기는 올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사춘기를 겪었어요. 집중을 못 하니 공부도 싫고 바둑도 멀어지고…. 승패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했죠.” 2014년 1월 입단대회가 그에겐 프로가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이번에 안되면 다른 길을 가자’고 생각했다. 응시생 200명 중 20명이 남을 때까지 살아남아 대국을 벌였다. “마지막 승부였어요. 진 걸 알았지만 손에서 돌을 놓질 못했어요. ‘지면 어쩌지’ 초조해만 하다 내 바둑에 집중 못 한 게 패착이었죠.” 프로 입단만 바라보고 달려온 6년의 세월은 스스로에게 패하면서 끝났다. 활로를 찾아야 했다. #활로의 행마(세력을 펴서 돌을 놓는 것) 이제 뭘 하나. 막막해하던 차에 LA에 먼저 와있던 스승 김명완 9단이 손을 내밀었다. 연구생을 그만둔 2014년 유학을 왔다. 미국은 최적의 활로(돌이 살 길)였다. 그해 8월 뉴욕에서 열린 US오픈 바둑대회에 참가했다. 북미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됐고, 최대 규모 대회다. 처음 바둑을 시작할 때처럼, 덜컥 우승을 했다. “뉴욕 구경도 할 겸 재미삼아 참가했어요. 그런데 신기했어요. 승부에 집착하지 않으니까 내 바둑을 두게됐고, 이기더라고요.” 2014년 우승후 ‘강한 돌’의 행진은 계속됐다. 미국바둑협회와 LA한국문화원이 매년 가을 공동 주최하는 남가주 오픈 바둑대회(Cotsen Open)에서 지난해까지 5년 내리 우승을 했다. 또 2015~2018년엔 60여 개 국 200명의 대표가 참가하는 세계대학생 바둑대회서 2~3위에 올랐다. 혜성같이 나타난 신예 고수에게 배우겠다는 학생들이 줄을 이었다. 1:1 바둑 강의를 시작했다. 현재 6~7학년 7명을 가르치고 있다. 한인은 없고 중국계, 백인 학생들이다. 학업도 순조롭다. 패서디나시티칼리지에 다니면서 올 가을 UC계 편입을 준비중이다. 바둑 입상경력은 가산점이어서 유리하다. 전공은 컴퓨터 공학이다. #완생의 꿈 -미국 1등이다. 여전히 미생인가. “아직 그렇다. 완생은 바둑에서 ‘두 눈(두 집)을 가진 돌’을 뜻한다. 한쪽 눈은 컴퓨터 엔지니어가 되고 다른 쪽 눈은 미국에서 한국 기풍의 바둑을 누구에게나 편하게 가르쳐 줄 수 있는 상황이 되면 완생이 아닐까 싶다.” -본인에게 바둑이란. “떼려야 뗄 수 없는, 너무 좋고 재미있지만 때론 지겹고 싫증나고…애증의 관계다.” -프로를 포기한 것 후회안하나. “동갑내기 동기들이 한국 바둑 정상에 있다. 여자 바둑 랭킹 1위인 최정(23) 9단, 아마추어 랭킹 1위 허영락이 친구들이다. 처음엔 부러웠지만 시간이 지나니 무덤덤해졌다. 나도 내 바둑을 두고 있어서다.” -인생 바둑판에서 행마는 어디쯤 왔나. “이제 막 ‘귀’의 단계를 끝냈다.(바둑에서 돌은 필연적으로 귀에서 변으로, 변에서 중앙으로 향한다.) 미국에 와서 변으로 가는 착점을 놓았다. 중앙으로 가는 ‘신의 한 수’로 만들고 싶다.” -지난해 12월 이세돌이 은퇴대국에서 AI와 대결했다. “관심이 많았다. 이번 대국은 두 번째다. 2016년엔 ‘알파고’와의 대국 이후 바둑계에 큰 변화가 왔다. 그전까지 바둑 공부는 인간끼리 복기하고 토론해 최고의 묘수를 찾았다. 그런데 이젠 연구생들이 AI 프로그램을 돌려 수를 찾는다. AI가 인간의 스승이 된 상황이다. 사람만 할 수 있는 묘미가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다.” -기억에 남는 가르침은. “연구생 시절 힘들어 바둑을 그만두고 싶었다. 한 선생님께서 잊지못할 가르침을 주셨다. ‘성적이 나쁘다고 그만두지 말아라. 오히려 좋을 때 떠나야 미련이 없다’고. 당장 눈앞의 결과가 나쁘다고 포기한다면 다른 일을 해도 또 그만두게 될 거라는 말씀이셨다.” -인생의 고수란. “미생은 두 눈이 없는 깜깜한 암흑 속에서 상대의 집요한 공격을 받아내고 이겨야 한다. 비록 아직 미숙해서 두려워도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면서 잘할 수 있다면 진정한 고수다.” ▶문의: 이메일(wldus870517@gmail.com) 정구현 기자 koohyun@koreadaily.com chung.koohyun@koreadaily.com

2020-02-02

'찰나의 무예'로 수사의 고수가 되다

24년 베테랑…한인 형사 최고위 박사 과정중 경찰 입문한 엘리트 3개 국어 능통 첫 한인 살인과 형사 검도 5단 합해 ‘무술 10단 고수’ 타운내 ‘조천관’서 자원봉사 지도 출근시 설렘이 없다면 은퇴할 때 “고수란 문제 해결하는 지도자” 고수는 인생이 놀이터다. 자신하되 자만하지 않는 '수의 경계'를 터득해서다. 그래서 깨달음 없이 부나 학식, 기술만을 습득한 자는 하수에 가깝다. 고수는 고집스럽게 '장이'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다. 잘하는 일을 즐기면서 한다. 찬찬히 주변을 보면 고수는 어디나 있다. 휴대폰 연락처를 열어보니 고수들이 차고 넘쳤다. 받아만 뒀던 명함더미 속에서도 고단자들의 이름은 돋보였다. '기자의 지인만 지면에 나온다'는 의심은 접어도 된다. 독자들로부터도 후보 추천을 받는다. 한인사회 고수들을 찾아 나선다. 검도장이 교회에 있다고 했다. 132년 된 유서깊은 건물인 LA한인타운내 ‘임마누엘장로교회'였다. 저녁시간 찾아간 교회 내부는 캄캄한 미로였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헤매던 중 어디선가 고음의 기합소리가 쩌렁거렸다. 소리를 따라간 곳은 실내체육관이다. 문을 여니 시큼한 땀냄새가 훅 몰려왔다. 내부에선 20명이 동시에 지르는 서로 다른 기합과 “따다닥” 죽도 부딪히는 소리, “쿵쿵쿵” 발구르는 울림이 귀를 때렸다. ‘고수를 찾아서’의 첫 인터뷰 대상인 조지 이(한국명 관도·52·사진) LAPD수사관이 20명의 수련생과 대련에 땀을 쏟고 있었다. LA경찰국(LAPD) 램파트경찰서의 성범죄 및 가정폭력 전담반 반장인 그는 ‘조천관’이라는 검도장에서 27년째 칼을 갈고 있다. 연재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그를 첫 인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 반장은 우선 무술의 고수다. 검도와 태권도 각각 5단씩 10단의 고단자다. 검도는 1993년 시작했다. 태권도를 먼저 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몸이 둔해졌다. 60~70대까지 할 수 있는 무예가 검도였다. “태권도는 공격당해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싸울 수 있지만 검도는 찰나의 무술이에요. 진검승부라면 단 한 번 실수에 목숨을 잃어요. 그 긴장은 사건 현장에서 큰 도움이 되죠.” 조천관의 사범인 그는 가르침의 고수기도 하다. 4단을 딴 이후 20년째 자원봉사로 아이들을 지도한다. “이곳에서 나도 배웠으니 가르쳐야 할 빚이 있어요. 또, 오히려 제가 배워요. 검도는 1:1 승부지만 ‘I’가 아니라 'We'의 무예예요. 가르치면서 수사반장으로 갖춰야 할 팀워크, 리더십을 터득했습니다.” 검도에서 자연스럽게 직업으로 이야기가 흘렀다. 무엇보다 그는 수사의 고수다. LAPD의 대표적인 엘리트 형사로 뼛속까지 경찰이다. 96년 USC 교육심리학 박사 과정을 밟다가 경찰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는 우리말, 영어, 스패니시까지 3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네 살 때 한국에서 아르헨티나로 가족 이민을 가 12세 때 다시 미국으로 두 번째 이민온 힘든 타지 생활이 소통의 날개를 달아줬다. 명석한 두뇌에 3개 커뮤니티 문화를 이해하는 현실감각까지 두루 갖춘 그는 현장에서 탁월한 수사관으로 인정받았다. 형사가 된 지 1년 만에 한인으로는 최초로 수사과의 꽃인 살인과에서 일하게 됐다. 14년 전인 그때 그를 언론으로는 처음 인터뷰해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2006년 8월14일자 A-5면> 현재는 LAPD내 수사관중 한인으로 최고위 계급을 달고 있다. -인터뷰한 지 14년이 지났다. 이젠 최고참 형사가 됐겠다. “벌써 그렇게 됐나. 정말 어제 같다. 그때 ‘D I’이었는데 지금은 ‘D III’다. (수사관의 계급 명칭, D는 Detective를 뜻하고 I, II, III 순으로 진급한다.)” -14년간 2계급 진급에 그쳤다. 더 올라갈 수 있었을 텐데. “더 진급하기 싫어 시험을 안보고 있다. 난 현장 체질이다. D III는 수사관으로서 최고 계급이다. 그 위인 루테넌트는 경찰이라기보다 조직을 관리하는 정치인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수사관은 현장에 있어야 한다.” -잊지못할 사건이 있다면. “2년 전이다. 한인타운 한 아파트에서 한인 남성이 마약에 취해 동거중이던 한인 여성을 50차례 칼로 난자한 사건이 있었다. 언론엔 보도되지 않았다. 피해 여성의 부상은 심각했다. 칼을 맨손으로 막느라 열 손가락이 다 잘려 출혈도 많았다. 마약에서 깬 가해남성이 직접 경찰에 신고했던 사건이다.” -그런 사건이야 적지 않을 텐데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 정도의 부상을 당하면 십중팔구 죽는다. 그런데 피해 여성은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가족, 친척 한 명 없던 피해자는 두 달간 병원에서 혼자 사투벌여 목숨을 건졌다. 죽음 직전까지 간 피해자가 살았다는 것은 형사들에겐 큰 기쁨이다. 범인에겐 17년형이 선고됐다. 엄중한 법의 심판을 받게한 것도 보람이다.” -여러 경찰서에서 일했다. 어디가 가장 좋은가. “한인타운 전담지서인 올림픽경찰서를 비롯해 5개 경찰서를 거쳤다. 타운과 인접한 램파트경찰서가 내겐 고향이다. 악명높은 엘살바도르 갱단인 'MS-13’의 근거지고 가장 많은 사건이 벌어지는 지역이지만 바쁜 만큼 보람도 크다.” -살인과 형사를 오래했다. “6년이다. 살인과를 떠나 아쉬운 건 미제 사건들이다. 모두 10건이다. 범인을 잡지 못한 자책감과 숨진 피해자들을 잊을 수 없다. 모든 타살이 억울하지만 어린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차량주행 총격에 맞아 죽는 일들은 가슴 아프다.” -현재는 성범죄 전담반 반장이다. 이제 처참한 현장은 많지 않을텐데.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성범죄를 맡으면서 참 ‘세상이 이렇게 악할 수 있나’ 치가 떨릴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얼마 전엔 두 살난 여아를 삼촌이 강간한 사건이 있었다. 악마가 따로 없었다.” -24년 전 새내기 경관 때와 지금의 경찰 조직을 비교한다면. “가장 큰 변화는 한인 경관수가 크게 늘었다. 내가 경찰이 됐을 때만 해도 50~60명 정도였는데 지금 250명이 넘는다. 또 요즘 세대 한인 경관들은 다들 학력이 높다. 예전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대신 군에 들어가 전역 후 경찰이 되는 코스가 전형적이었다. 우리 세대 한인 경찰들보다 다들 똑똑해서 요직에 더 많이 오를 것이라고 확신한다.” -경찰은 위험한 직업이다. 이젠 은퇴하고 편하게 살아도 되지 않나. (LAPD 경찰들은 20년 이상 근속자부터 은퇴하면 사망할 때까지 연금을 받는다. 20년 근속은 근무중 가장 많이받았던 연봉의 50%를, 그 후 근속기간이 1년씩 늘 때마다 3%가 추가된다.) “난 갈수록 출근이 즐겁다. 경찰 제복을 입은 첫날의 설렘을 아직도 매일 아침 느낀다. 그런 흥분과 신남이 없어질 때가 그만둘 때 아닌가.” -고수의 정의는. “기술이 뛰어난 사람이라기보다 문제 해결 능력을 가진 리더라고 본다. 리더십은 정직하게 몸으로 배우는 것 외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조천관 문의:(909)919-0770 이준서 사범 정구현 기자 chung.koohyun@koreadaily.com chung.koohyun@koreadaily.com

2020-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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